고정불변 가치를 고집 않고
폐쇄적인 집단문화에 저항
타자를 향한 삶의 궤적으로
새로운 문명 가능성 열었던
세 종교 시조 아브라함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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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대 명예교수 |
그로부터 800여 년이 지난 BCE 12세기, 길을 떠난 또 한 사람이 있었다. 목적도 계획도 분명하여 무모함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여정을 택한 탁월한 영웅, 오디세우스라는 젊은 청년이었다. 그는 트로이 전쟁에서 목마(木馬)의 계략으로 10년간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리고 다시 10년에 걸쳐 온갖 고난과 시련을 겪은 후 아내와 아들이 기다리는 고향 이타카로 돌아갔다. 그의 여정은 본향으로의 회귀, 곧 자신이 속했던 원래의 질서로 돌아가기 위한 것이었다.
단테의 '신곡'에서 오디세우스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지나친 탐구욕 때문에 지옥으로 떨어지고 말지만, 그가 이겨낸 고난과 시련 역시 자신의 정체성을 재확인하기 위한 과정이었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경험과 지혜를 쌓은 것도 오로지 '자신의 자리'를 되찾기 위함일 뿐이었다. 결국 오디세우스는 동일자의 전형이자 철저히 '자기중심적 귀환'을 성취한 헬레니즘의 모범적인 영웅이었던 셈이다. 오디세우스의 철저함으로 말미암아 늘그막에 먼 길을 떠난 노인의 무모함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도무지 떠날 준비조차 하지 못하고 있던 그는 정착과 유목, 다신교와 유일신, 생존과 윤리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했다. 그러나 어느 한쪽을 완전히 선택하기보다는 겸손하게 자신의 외연을 넓히는 데 힘을 쏟았다. 살아남기 위해 아내를 적의 손에 넘겨야 했고, 외아들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 실존적 딜레마에 직면해야 했다. 그러면서 그는 익숙한 질서를 답습하는 대신 낯선 세계를 적극적으로 경험하고, 자신을 확장해 갔다. 그의 여정은 단순한 지리적 이동이 아니라 철저히 '타자를 향해 열린' 삶이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오디세우스와 달리, 귀환을 통해 완성시킨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점진적으로 형성시킨 것이었다.
'타자를 향한 열림'이란 성숙한 인간의 가장 큰 덕목이다. 문명이 자기 완결적인 시스템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고 발전하는 과정인 것과 마찬가지다. 자기만의 가치관과 정체성에 갇히지 않고, 폐쇄적인 집단문화에 저항하고, 고정불변의 가치를 고집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문명의 본질이다. 변화와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태도이다. 기존 질서에 새로운 가치와 질서를 보태는 역동적인 태도야말로 새로운 시대가 필요로 하는 패러다임이다.
무모한 노인이 길을 떠난 시점은 수메르 문명이 쇠퇴하고 바빌론 문명이 등장하던 과도기였다. 완성보다는 과정에 비중을 둔 그의 여정은 바빌론에서 가나안으로 이동하며 새로운 문명의 가능성을 열었고, 소위 '문명의 초승달' 지역을 걸으며 히브리즘의 궤적을 더욱 분명히 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묵묵히 수행하며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조상이 되었다. 75세에 길을 떠난 이 무모한 방랑자, 바로 아브라함 할배다.김중순 계명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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