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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형 음악인문학자·대구챔버페스트 대표 |
은행나무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 가운데 하나로서 자그마치 2억 년 전부터 존재해 왔다. 이 나무는 병충해와 오염, 기후 변화는 물론, 심지어는 히로시마 원폭의 폐허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놀랍지 않은가! 이는 생명의 생명이며, 마음의 평화와 회복의 상징이다. 노란 잎의 은은한 빛처럼, 오래된 명곡처럼, 가만히 울림을 주는 이 나무는 신의 언어와 향기를 품은 듯하다. 이번 음악회에서는 그런 은행나무의 고요와 생명, 선율을 살리고자 노력했다.
'은행(銀杏)'이라는 말과 사물은 사유의 촉발점이 되었다. '은(銀)'은 견고한 흰빛의 외형을, '행(杏)'은 살구나무를 뜻하며, 그 열매는 은행과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한약재로 쓰이는 '행인(杏仁)'은 '어진 마음(仁)'을 담은 씨-종자를 말한다. 은행나무는 유가의 핵심 가치인 '인(仁)'의 사상을 갈무리한 나무다. 은행나무 주변에서 사랑을 확인했던 것은 암수가 서로 가까이 붙어야만 열매를 맺는 데에서 유래한다. 이러한 생태의 특이점은 공존과 배려, 사랑의 철학을 상징한다. 또한 곧고 흔들림 없이 자라는 모습은 선비정신의 표상이기도 하다. 많은 서원에서 은행나무를 다투어 심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공연이 끝날 즈음, 문득 한강 작가의 소설 '채식주의자'가 떠올랐다. "세상의 나무들은 모두 형제 같아." 소설 속 주인공 영혜에게 나무는 단순한 식물이 아닌, 인간 존재의 표상이었다. 어느 날 영혜는 말한다. "물구나무서 있어." 두 다리를 치켜들고 머리를 땅에 박은 이 모습은 단순히 거꾸로 선 동작이 아니라, 생명의 본래로 회귀하려는 나-무의 깊은 열망이자, 문명과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마지막 의지처럼 보인다. 이를 두고 한강은 '참된 말'이라 명명한다. 한편, 한강은 왜 '채식주의자'라는 제목을 선택했을까? 채식은 수렵과 채집 시대로 향하는 그리움이며, 삶의 근원을 향한 본능적 회귀다. 채식주의는 그런 향수에 대한 이념과 의지이며, 채식주의자는 이를 실천하려는 인간의 선언에 해당한다. 주인공 영혜는 모든 것을 내어주고도 제 자리를 지키는 나무이고자 했다. 이는 가장 순수한 생명에 닿고자 했던 절실한 몸짓이었다.
한강은 말한다. "나에게는 이 소설('채식주의자')을 껴안을 힘이 있다." 아니, 우리에게는 이 현실을 껴안을 힘이 있다. 불과 며칠 전, 하동에서는 산불로 900년 된 은행나무가 전소되었다. 한 지역의 순수한 기억과 정신이 순식간에 재가 된 이 아픔과 절망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느껴야 하는지….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집을 잃고, 가족을 잃고, 일터를 잃어 헤매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껴안을 수 있다. 견딜 수 있다. 나무처럼, 뿌리를 내리고 묵묵히 서서.
진정한 희망은 현실과 동떨어진 노래가 아니라, 늪과 같은 삶의 바닥에서도 이를 정화하는 식물처럼, 침묵하며 살아내는 힘에 있다. 은행나무는 묻는다. "너는 너의 자리에서 어떤 생명을 품고 있니?" 이번 음악회는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었다. 음악 나무처럼. 오래된 생명이 들려주는 이 고요한 울림이 누군가의 마음을 살리고, 누군가의 봄이 되어줄 수 있다면. 임진형 음악인문학자·대구챔버페스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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