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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모란이여

2025-04-17
[문화산책] 모란이여
신노우 (수필가·시인·대구문인협회 수석부회장)
누가 향기 없는 꽃이라고 했던가. 새벽 운동을 마치고 아파트 입구를 들어서는 순간 나를 와락 안아버린다. 황홀하다. 톡 쏘지도, 진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밋밋하지도 않다. 그저 넌짓하고 쌉쌀하면서도 부드럽고 달콤해서 맡을수록 그 향기에 자꾸만 정신이 몽롱하게 빠져든다.

사는 아파트 계단 입구에 터줏대감처럼 자리하고 있는 모란 한 무더기가 있다. 사계절 그저 그곳에 있는지 모를 만큼 볼거리 없는 외양이다. 그러다가 을씨년스러운 겨울 추위가 오는 봄에 쫓겨 꼬리를 감출 즈음에 불쑥 가지 끝에 꽃봉오리를 내민다. 북풍한설을 꿋꿋하게 견디고 봄을 먼저 구가하기 위해 생강나무, 산수유, 히어리 뒤를 이어 일찍 꽃피는 나무 중에 하나다.

모란꽃 앞에 선다. 풍성한 꽃잎은 넉넉한 웃음으로 나를 맞는다. 심호흡으로 그 향기를 맡노라니 스트레스로 생긴 마음의 주름을 한꺼번에 좍 펴주며 뭉게구름 위를 걷는 양 무한 힐링이 된다. 손바닥만 한 열네 장 검붉은 꽃잎은 꽃가루를 열네 살 순정처럼 가슴에 겹겹으로 감추었다. 꽃잎은 아침 햇살에 요염하게 펼쳤다가 석양 따라 다소곳이 접기를 반복한다. 그러나 열흘을 채 참지 못하고 몽정하듯 노란 꽃가루를 툭 쏟으며 사고를 쳐 버린다. 암술과 수술이 드디어 합방한 것이다. 이제 밤이 와도 그전처럼 곱게 서로를 애틋하게 보듬지 않는다. 그저 심드렁하게 오므리는 척만 하는 것이 꼭 지금에 우리 부부의 사랑 같다.

새벽 운동에서 만나는 이들에게 요즘 모란꽃 향기에 흠뻑 취해 산다고 하였다. 모란은 향기가 없는 꽃이라고 우긴다. 운동을 마치고 모란꽃에 가보면 알 것이 아니냐며 안내하였다. 모두가 선향에 감탄하며 꽃가루가 코끝에 묻히는 줄도 모른 채 꽃잎에 마구 들이댄다.

꽃이 다 지기 전에 황홀한 향기와 넉넉한 모습을 두고두고 간직하고 싶다. 안방마님 같은 검붉은 모란꽃 한 송이를 곱게 말려서 한지 부채 중심에 놓는다. 코팅지를 덮어 가장자리 전체를 눌러 붙여 완성한다. 한 번의 부채질에도 시원하다.

바람이 분다. 봄이 무르익는다. 탐스러운 붉은 모란꽃잎도 봄바람에 몸을 맡기다가 씨방의 결실을 확인하고 하나둘 맥없이 꽃잎을 떨구며 이별한다. 봄바람은 떨어진 꽃잎마저 이리저리 쓸어버린다. 그 고운 자태는 어디로 가고 푸른 잎사귀만 시침을 뚝 떼고 성성하게 자리했다.

눈을 감는다. 지난 세월의 짧았던 내 청춘과도 같은 붉디붉은 모란꽃, 그 그윽한 향이 코끝에서 너울춤을 춘다. 가슴 방망이 치는 첫사랑 같은 널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하나.

신노우〈수필가·시인·대구문인협회 수석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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