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유미 작전명이유 대표
무더운 여름날, 마을회관에 모인 주민들은 서로를 다양한 이름으로 부른다. "명장님~" "여배우님~" "교장 선생님~". 평범한 일상 속 호명이 관계를 바꾸고, 참여를 이끌며, 문화의 씨앗이 된다. 칠곡 인문학마을에서는 '이름을 새롭게 부르는 일'이 곧 문화의 시작이 된다.
필자는 칠곡군 '인문학마을' 사업을 주민들과 함께 기획하고 실행해 온 문화기획자다. 마을에서 일어나는 작은 문화의 변화가 공동체의 삶에 어떤 태도와 관계의 전환을 일으키는지에 관심을 두고 활동해 왔다. 일상의 흐름 속에서 삶과 문화의 접점을 탐구하는 생활밀착형 문화연구자이기도 하다.
칠곡인문학마을은 2013년 9개 마을에서 시작해 현재는 24개 마을이 참여하는 '주민 주도형 문화공동체'로 성장해 왔다. 이 마을들은 각각의 고유한 역사와 삶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생활 속 인문자원을 발굴하고, 주민이 주체가 되는 문화 활동을 꾸준히 실천해 오고 있다.
10여 년간 이 사업의 기획과 실행을 함께하는 과정에서 가장 깊이 있게 관찰해 온 문화적 행위 중 하나가 바로 '서로를 어떻게 부르느냐'였다.
왜관읍 금남2리 매봉서당에는 소문난 잔소리꾼 어르신이 있었다. 청소며 전기, 물 절약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 쓴소리를 퍼붓던 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이장이 그분을 '교장 선생님'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그날 이후, 어르신은 먼저 쓰레기통을 비우고, 회관 문을 닫으며 마을에 도움되는 일을 자처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금남리 교장 선생님'이라 하면 마을 주민 누구나 떠올리는 대표 어른이 됐다.
또 다른 사례로는 '신가이버' 어르신이 있다. 손재주가 좋던 이 어르신은 마을회관의 고장 난 물건들을 몇 차례 말없이 고쳐 주었고, 주민들은 자연스럽게 그에게 '신가이버'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때부터 마을에서 무언가 고장나면 누구랄 것도 없이 '신가이버 어르신'을 찾는다. 이름 하나 붙여주는 것만으로 마을 전체가 의지하는 기술 담당자가 된 셈이다.
북삼읍 보손2리의 김학술 어르신은 참외 농부로 살아오셨지만, 신문지를 꼬아 만든 복조리와 호리병 등 재생공예 솜씨가 알려지며 '명장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그 기술은 마을 주민들과 함께 나누어졌고, 학교와 아파트에서 강의도 하며 자유학기제 선생님으로 활동하게 됐다.
문화예술이란 무언가를 심미적으로 표현하고 즐기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작은 공동체에서는 한 사람의 이름을 다르게, 존중의 마음으로 부르는 그 순간부터 문화가 시작된다. 올 여름, 당신이 부르는 그 이름 안에는 어떤 관계의 온기가 담겨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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