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철희 수석논설위원
트럼프의 언행은 지랄탄 같다. 어디로 튈지 종잡을 수 없어서다. 하지만 그의 언행 기저에 흐르는 원칙은 있다. 바로 '미국 우선주의'다. 다른 나라야 어떻게 되든, 미국을 위해 돈과 일자리를 내놓으라는 것이다. 흥청망청 살던 집안 형이 빚잔치를 위해 동생들의 쌈짓돈을 상납받는 모양새다. 트럼프는 관세와 환율이라는 칼로 지구촌의 경제 생태계를 갈가리 찢어놓는다.
트럼프는 내상 없이 관세전쟁에서 승기를 잡자, 더 큰 탐욕을 부린다. 환율전쟁(약달러)으로 한꺼번에 빚을 청산하고픈 게 속셈이다. 이 칼을 함부로 쓰면 큰 코 다친다는 점을 모를 리 없지만, 그래도 유혹을 쉽사리 떨칠 수 없다. 40년 전 일본과 독일(플라자합의)에 이 칼을 휘둘러 한몫 단단히 잡았던 전례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무역국의 덩치도 커진 데다, 예전만큼 호락호락하게 당할 것 같지도 않아 살짝 겁도 난다. 일단, 무역국의 인위적인 화폐가치 하락을 방치하지 않겠다는 으름장만 놓고 있다. 강달러 상황을 차단, 관세 효과를 누리겠다는 의도다. 관세전쟁의 지향점이 '온쇼어링(제조시설 미국 이전)'이라면, 환율전쟁은 미국의 재정적자 축소와 제조업 경쟁력 부활이라는 두 토끼를 잡기 위해서다. 두 개의 칼을 잘 활용하면 제국의 번영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게 트럼프의 희망 회로다.
지구촌에 환율전쟁이라는 제2차 전운(戰雲)이 짙게 드리운다. 우리에겐 아직 외환위기의 트라우마가 깊다. 강달러도 무섭지만, 약달러의 폐해도 크다. 일본의 '잃어버린 30년'도 약달러의 올가미에 걸려든 데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봐도 그렇다. 1985년 미국이 일·독의 팔을 비틀어 약달러를 유도한 '플라자합의' 후폭풍은 거셌다. 엔화 강세를 용인한 이 합의가 '잃어버린 30년'의 신호탄이 될 줄을 일본의 그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또 옛 소련연방 해체의 단초가 됐다. 미국의 노련한 양털 깎기에 세계지형마저 바뀌었다. 관세가 국지전이라면 환율전쟁은 세계대전에 버금가는 심각한 피해를 초래한다. 세계 경제의 침체, 국제 갈등을 심화시키는 '패자만 있는 게임'이다.
그렇지만 트럼프는 눈앞의 이익에 취해 약달러 카드를 만지작거린다. 우선 스티브 미란 백악관 경제자문위원장을 연준(Fed) 이사에 지명했다. 약달러 정책의 포석이다. 그가 내놓은 '미란 보고서'는 트럼프 정책의 방향타이다. 이 보고서의 핵심은 징벌적 관세와 약달러, 저금리이다. 트럼프는 검증되지 않은 '미란의 논리'에 기반한 정책으로 지구촌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무역국들도 고심한다. 일단 확전은 자제하는 분위기다. 겉으론 뻣뻣하게 버티는 중국도 최근 위안화 절상에 나서, 트럼프의 구미에 맞춰준다. 그렇다고 트럼프가 이 전쟁을 포기할 의향은 없다. 그도 달러 패권과 재정적자 축소가 상충하는 정책임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그가 이 딜레마의 묘수를 찾기 위해 좌충우돌 행보에 나설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대외환경 변화에 취약한 한국은 이 전쟁의 최전선에 서 있다. 관세에다 환율전쟁까지 맞서야 하는 '이중 덫'에 걸린 형국이다. 원화 강세는 물가 하락이라는 이점도 있지만, 우리 기업이 가격 경쟁력을 잃고, 수출 부진, 고용 감소, 성장률 추락이라는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 득보다는 실(失)이 크기에 걱정이 앞선다. 트럼프가 열어젖힌 예측 불허의 경제 전쟁 시대, 탐욕과 충동으로 덧입혀진 '새로운 질서'에 적응할 묘안을 찾으려니 답답하기 그지없다.
트럼프 관세전쟁 승기잡자
적자축소·제조업 부활위해
약달러 정책 카드를 만지작
환율전쟁 모두에게 큰 피해
한국도 경제난 악순환 우려

윤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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