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 재판에 판사와 법대를 조롱
‘대법원장이 뭐라고’ 비하도
삼권분립의 축, 흔들리는 법치
사법체계 구축한 인권변호사
법조인 이인(李仁)의 길 떠올려
박재일 논설실장
진보성향 신문 칼럼을 읽다 섬찟 놀랐다. 윤석열 전 대통령 계엄 발동, 법적으로 '내란 우두머리 혐의' 재판을 놓고 칼럼니스트가 밝힌 소회 때문이다. 서울중앙지법 지귀연 부장판사의 재판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중계된 재판의 영상 한 토막만 봐도 구토가 날 지경이다"고 썼다. 재판이 만담극처럼 진행된다고 비꼬았다. 지인 변호사들에게 물어봤다. 지 부장판사의 방식이 이례적인가? 전혀 그렇지 않단다. 재판도 이제 피고인, 나아가 국민 설득을 이끌어야 할 의무가 있는 시대라, 하나하나 물어보고 어쩌면 '친절하게' 증거를 수집해야 한다고 했다.
12.3 계엄은 재판 폭증을 낳았다. 덩달아 대한민국 사법부가 통째로 시련이다. 법대를 향한 시선도 뒤틀려 있다. 변호인이 법정에서 판사를 조롱하고 유투버에 등장해 공격한다. 집권여당 대표는 "대법원장이 뭐라고"라며, 내란전담재판부를 설치하겠다고 압박한다. 이 시점에 내가 한 변호사를 떠올리는 이유다.
대구지방변호사회는 매년 '애산(愛山) 이인 인권상'을 수여한다. 필자는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인(李仁. 1896~1979), 그는 대구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시절 경북실업보습학교를 거쳐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를 졸업했다.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후 해방될 때까지 오직 독립운동가 변론에만 매진했다. 첫 변론이 그 유명한 의열단(義烈團) 사건이다. 광주학생운동·6.10만세· 대구조선은행 폭파 시도 사건 등 독립운동을 관통한 사건 변론에 일생을 바쳤다. 조선어학회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고문을 당하고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는 김병로, 허헌(월북)과 함께 일제강점기 3대 민족 인권변호사로 손꼽힌다.
지금의 고등법원인 복심법원은 당시 서울 평양 대구에만 있었다. 독립운동가 재판은 서울에서 하면 너무 눈에 띄고, 평양은 도망가기 쉽고 이런 저런 연유로 대구에서 많이 열렸다. 이인 변호사도 그 바람에 대구에서 활동을 많이 한 모양이다. 일제 강점기란 특수한 상황 속에 변호사 역할에 한계가 있지 않을까 하고 지인 변호사에게 반문했다. 그렇지 않단다. 법은 평가의 시스템이라 완전히 마음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라 했다. 무엇보다 이인은 해방후 대한민국 법치의 토대를 세우는데 헌신했다. 미군정의 수석대법관 및 검찰총장을 맡아 건국의 기초가 될 헌법과 정부조직법안을 초안했다. 법률가가 많지 않은 시절이었다. 정부수립후 김병로는 초대 대법원장, 이인은 법무부장관이 됐다.
인류 정치사에서 가장 훌륭한 발명품은 무엇일까? 플라톤의 철인정치, 공자의 군자정치도 무시할 수 없지만, 누가 뭐래도 삼권분립 체계일 것이다. 3권은 입법 행정 사법이다. 각각 계획·실행·평가를 담당한다. 권력은 정삼각형처럼 정립해 작동한다. 상호 견제의 의무도 있다. 민주주의는 그래야 돌아간다는 통찰이다. 삼권은 각 꼭지점에서 상대를 인정하는 절제를 전제한다. 내가 원하는 판사, 내가 바라는 재판, 내가 재단한 양형을 강요한다면 곤란하다.
법치의 흔들림은 사법 내부 요인도 있다. 전관예우, 로펌의 안락한 자리와 금전적 보상, 권력 눈치가 스쳐간 듯한 판결이 그런 것이다. 이인 변호사는 돈을 포기했다. 변호사가 넘치는 시대, 모두가 이인의 길을 걷기는 힘들 것이다. 그래도 먼저 간 이들의 헌신이 없다면 오늘은 없다. 이인의 길이 쌓이고 쌓여 우리는 민주의 완성을 기다린다. 지난 이맘때 계엄탓일까. 12월이 왠지 법과 정의, 삼권을 떠올리는 계절이 된 느낌이다.
박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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