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6일 영남일보 회의실에서 열린 제39회 상화시인상 본심 심사에서 심사위원들(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황지우 시인, 이경수 문학평론가, 오정국 시인)이 본심에 올라온 시집을 놓고 의견을 나누고 있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
예심을 거쳐 제39회 상화시인상 본심에 오른 시집은 모두 다섯 권이었다. 등단 후 10년 이상 활동해 온 시인들의 최근 시집으로 저마다 개성적인 성취를 보여주고 있어서 수상작을 선정하기까지 고심의 시간이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본심에 오른 시집들이 이전 시집에서 무엇이 달라졌는지 그 시적 성취와 변모의 의미를 짚어보았고, 무엇이 이것을 시이게 하는지 각 시집에서 시적인 것이 발생하는 자리를 특히 눈여겨보았다. 다섯 권의 시집을 대상으로 긴 토론의 시간을 가진 끝에 본심 심사위원들은 안희연 시인의 당근밭 걷기를 제39회 상화시인상 수상 시집으로 선정하는 데 뜻을 모았다.
안희연 시인의 네 번째 시집 당근밭 걷기는 이 세계의 슬픔을 온몸으로 감당하며 시를 써온 시인이 전쟁과 폭력과 재난으로 가득한 혹독한 세계와 마주하며 그 속에서 삶과 시 쓰기를 포기하지 않고 살아낸 기록이다. "발밑으로 돌이 굴러"(발광체)오고 "이유 없이 새 한 마리가 떨어"(밤 가위)지듯 이유나 원인을 알 수 없는 일들이 계속해서 벌어지는 세계로 내던져진 시인이 "돌이 녹는" "시간을" "어떻게 슬퍼"하고 "참아"내며 겪어왔는지, 그리하여 "나를 사랑하"고 더 나아가 우리를 "사랑하려는" "노력의 모양"(간섭)을 어떻게 만들어 왔는지 짐작게 하는 시집이다.
안희연의 수상 시집 당근밭 걷기에는 일상의 장면 못지않게 잠이나 꿈의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현실과 뒤섞이는 꿈의 장면은 때로는 악몽으로 때로는 치유의 공간으로 시의 주체를 이끌면서 혹독한 현실에서 발생하는 슬픔과 분노를 타자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랑과 연대의 힘으로 돌려놓는다. 식물이 등장하거나 식물의 목소리로 말하는 시에서 시인은 "한 존재를 안다고 말하기까지/매일매일 건너"온 시간과 "살아 있다는 이유로 우리가 나눠 가진 것"(자귀)이 서로의 "삶에 깊이 관여하기 시작했다는 뜻"(가는잎향유)임을 고백한다. "그의 잠을 지키"(율마)는 시간을 함께 겪으며 "죽지 마 살아 있어줘"(자귀)라는 말을 건넬 수 있게 되었을 때 안희연의 시가 건네는 사랑의 말은 독자들에게도 단단한 돌의 언어로 전해져 묵직한 울림을 준다.
표제시 '당근밭 걷기'는 희망 없는 시대에 "약동과 활력을 주는" 긍정의 힘을 당근밭의 상징을 통해 보여준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씨를 뿌리고 밭을 갈고 당근을 거두며 "수확의 기쁨"을 나누는 땅 위에서 비로소 "나는 있"(당근밭 걷기)음을 깨닫는 시적 주체를 통해 깊은 악몽과 슬픔의 시간을 지나 "서로의 목격자"(긍휼의 뜻)가 되어 주며 다시 살아갈 용기를 내 보자고 안희연의 시는 말한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며 가위눌리는 나날을 겪어온 시인이 비로소 들려줄 "긴 이야기"(당근밭 걷기)이므로 더욱 신뢰가 간다. 망가져 버린 세계에서도 시 쓰기만이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며 "한 사람을 구하는 일은/한 사람 안에 포개진 두 사람을 구하는 일"(긍휼의 뜻)임을 깨달은 안희연 시인이 앞으로 펼쳐갈 새로운 이야기를 기대하며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본심 심사위원=황지우(시인)·오정국(시인)·이경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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