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호 대구 수성경찰서 범죄예방계장
올해 들어 보이스피싱 범죄가 심상치 않다. 10월말 기준 전국 보이스피싱 발생 건수는 1만9천972건, 피해액은 1조566억원에 달했다. 작년 한 해 피해액(8천545억원)을 이미 훨씬 넘어선 것이다.
전체 발생 건수는 줄어드는 추세이지만 피해자의 휴대전화에 원격조정 앱을 설치하게 한 후 정보를 탈취, 계좌이체·카드결제 등 '탈탈 털이식' 범행으로 평균 피해액은 건당 5천290만원에 이르러 해마다 더욱 불어나고 있다.
보이스피싱 범죄는 이제 일부 피해자의 고통을 넘어서 우리 사회 전체를 위협하는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다. 보이스 피싱이 가장 무서운 점은 계좌의 돈만 빼앗아 가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범죄 조직의 거짓말에 속은 피해자는 대출까지 받아 피해 규모를 키우고, 그 결과는 개인과 가정의 경제적 붕괴로 이어진다.
피해 회복이 극히 어렵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예방이 가장 중요하다. 보이스피싱 범죄 예방을 위해 얘기를 나누다 보면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나는 안 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보이스피싱 범죄 피해자는 고령층이나 저학력자에 국한되지 않고 고학력자와 전문직 종사자도 적지 않다.
얼마 전 한 지인이 내게 털어놓은 얘기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출장 중 '우체국 배송 오류' 문자의 링크를 누른 뒤 수 일간 금융감독원 직원·서울지검 검사로 사칭한 범인들과 통화에서 "구속영장이 청구됐다" "배우자에게도 알리지 말라" "모든 계좌 잔액을 하나의 계좌로 모아라"는 지시를 듣고 이체를 준비하던 중 돈을 보내기 직전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 피해를 면했다고 한다. 대학을 나온 고위 공무원인 그도 범죄 조직의 정교한 시나리오 앞에서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이처럼 보이스피싱 범죄조직은 AI 등 첨단 기술을 활용해 그 수법이 날로 진화하고 있다. 정부기관 사칭은 물론이고 지원금, 국세환급 등 사회적 이슈를 악용하고, 도용한 개인정보로 맞춤형 접근을 시도해 피해자의 심리를 완전히 장악한다. 피해자가 보이스피싱 조직의 심리적 지배 상태에 들어가면 스스로 현금을 인출하거나 계좌이체를 하게 되는 게 일쑤다.
더 큰 문제는 현장 대응의 어려움이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 앞에서도 피해자가 범죄 조직의 지시에 따라 사실을 숨기거나 거짓 진술을 하기도 한다. 이에 대구 경찰은 112상황실, 지역경찰, 수사·형사 기능 간 협업을 강화하고, 심리 대응 중심의 현장 교육과 금융기관 공조를 통해 예방 역량을 높이고 있다.
대구수성경찰서 역시 전 지역 경찰관을 대상으로 피싱 대응 역량 교육을 실시하고, 현장대응 체크리스트와 통합 매뉴얼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특히 자체 보이스피싱 범죄 예방계획인 "묵! 지! 빠!" 프로젝트를 수립해 적극 추진하고 있다. 묵은 '묵묵부답'(의심스러운 전화), 지는 ' 지금 바로 전화 끊기', 빠는 '빠른 신고'(전화 끊고 바로 경찰에 신고)를 의미한다. 즉, 의심스러운 전화는 받지 말고, 받았다면 바로 끊고, 그 후에는 즉시 신고하라는 뜻이다.
또 금융기관과의 협력, 민·관·경 합동 캠페인, 옥외 홍보를 통해 시민 인식 개선에도 힘쓰고 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최근에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지구대 경찰관이 피해자를 끈질긴 설득하여 1억원을 송금 직전에서 막아낸 사례도 있다.
하지만 경찰과 관계기관이 아무리 노력해도, 최종적인 방어선은 시민의 경각심이다. 경찰·검찰·금융기관 등 그 어떤 기관도 현금 전달이나 계좌이체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기본 원칙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의심스러운 전화는 받지 말고, 받았다면 즉시 끊고 신고해야 한다. 이제 우리 모두 '묵! 지! 빠!'를 실천하자. 그것이 바로 보이스피싱 범죄로부터 자신의 재산과 삶을 지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최영호<대구 수성경찰서 범죄예방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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