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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칼럼]윤일현의 ‘밥상과 책상 사이’…속도보다 중요한 것

2026-01-02 06:00

속도보다 중요한 것

윤일현 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 대표

윤일현 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 대표

영어 단어 1월(January)은 로마의 양면신 야누스(Janus)에게서 비롯됐다. 그는 뒤쪽 눈으로는 과거를, 앞쪽 눈으로는 미래를 바라본다. 새해의 문턱에 선 인간에게 이 상징은 준엄한 경고처럼 다가온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지 않은 채 앞만 보고 질주하는 무모함과, 과거에 매달려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는 소극성 모두를 경계하라는 뜻이다. 시작은 언제나 선택의 문제이며, 그 선택 속에는 이미 우리가 마주할 방향과 결과가 잠재돼 있다.


인간의 가장 큰 오류는 충분히 숙고하지 않은 서두름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시작의 설렘은 잠시지만, 그 선택이 불러올 책임은 오래 남는다. 첫걸음의 방향이 여정 전체를 규정하듯, 출발에 앞서 끝의 무게를 가늠하는 신중함이 필요하다. 빠른 출발이 반드시 목적지에 이르게 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속도가 오히려 더 긴 우회를 낳는다. 올바른 시작이란 단순히 속도를 높이는 일이 아니라, 끝까지 감당할 수 있는 올곧은 방향을 정하는 일이다. 성급함은 효율을 유혹으로 내세우지만, 그 대가로 삶의 깊이를 잃게 만든다.


지금 우리는 인공지능이라는 거대한 문명사적 전환의 한복판에 서 있다. 기술은 눈부시게 진보하고, 세상은 급격히 바뀔 것이라는 기대와 그것이 일으킬 불안이 교차한다. 그러나 기술 발전이 인간의 삶 자체를 대신할 수는 없다. 기술은 문명의 수단일 뿐이며, 그 수단을 어떤 가치와 목적 아래 사용할지는 결국 인간의 몫이다. 진정한 지혜는 정교한 코드가 아니라 판단과 성찰의 영역에 존재한다. 그 판단의 힘은 오랜 시간에 걸쳐 길러지는 내면의 근육이다.


플루타르코스는 시간이 신중한 자에게는 벗이 되지만, 조급한 자에게는 적이 된다고 했다. 조급함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단단한 지혜가 뿌리내리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빨리빨리'의 효율 속에서 사유의 리듬을 잃어왔다. 수단적 이동에 치중한 '도로의 문화'는 목적지에 빠르게 이르게 하지만, 그 과정의 시선과 여유를 앗아간다. 반면 과정적 체험을 중시하는 '길의 문화'는 느리지만 풍경을 음미하고 자아를 발견할 시간을 남긴다. 밀란 쿤데라의 말처럼, 속도는 망각의 형식이다. 기술이 인간의 속도를 앞지르는 시대일수록 우리는 오히려 더 천천히 사고하며 존재의 중심을 잡아야 한다. 느림은 게으름이 아니라 집중의 또 다른 방식이다.


교육의 역사는 현실을 이해하는 힘과 미래를 내다보는 가치가 균형을 이루며 발전해 왔다. 학습자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야 하지만, 동시에 어떤 방향으로 성장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면의 기준도 함께 세워야 한다. 우리는 압축 성장 과정에서 '빨리 배우고 곧 적용하는 공부'에 익숙해져 왔다. 링컨이 "나무를 벨 시간의 대부분을 도끼날을 가는 데 쓰겠다"라고 말한 일화는 배움의 본질을 되돌아보게 한다. 준비와 사유의 시간이 없다면 기술이 선사하는 속도는 방향을 잃고 표류할 뿐이다.


AI가 정답을 빠르게 제시하는 시대일수록 인간은 질문의 깊이로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 질문이 얕아질수록 사유는 메말라가고, 인간의 고유함은 희미해진다. 과정 없는 배움은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현대 사회는 점점 여백을 허락하지 않는다. 디지털 기기는 시선을 끊임없이 빼앗고 사유의 흐름을 단절시킨다. 우리는 소음에 지쳐 있으면서도 정작 고요한 상황이 주어지면 불안해한다. 최근 등장한 '자발적 고립'이나 '디지털 거리두기'는 인간이 내면의 균형을 회복하려는 자연스러운 시도다. 연결을 잠시 끊고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사유의 회복이자 영혼의 재충전이다.


디지털의 속도가 거세질수록 아날로그적 감각과 느린 공부의 가치는 더욱 선명해질 것이다. 새해의 시작은 늘 희망과 각오를 품지만, 진정한 각오는 속도를 늦추고 본질을 응시하는 데서 비롯된다. 결과를 서둘러 확인하기보다 배우는 과정에서 기쁨을 발견할 때 삶은 비로소 단단해진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격언은 속도가 아닌, 차분하면서도 정직한 보폭에 대한 예찬이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빨리 가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단단히 다지며 걸어가느냐다.


기술에 휘둘리지 않고 감정과 지성을 조율하며, 세상에서 잠시 물러나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인간으로 남기 위한 최소한의 훈련이다. 시행착오 속에서도 다시 질문하고, 다시 배우는 태도, 이것이 인공지능 시대를 견뎌낼 인간의 가장 강력한 무기다. 우리의 꿈이 지나치게 조급해지지 않기를, 느림의 지혜가 새해의 첫걸음이 되기를 바란다. 인류의 오랜 지혜를 등불 삼아, 불확실한 길 위에서도 차분하게, 그러나 단단하게 걸어가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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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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