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서 유년시절 6년…옆집에 가수 박학기 살고 있었지만 모르고 지내
1964년 대봉동서 5남매중 막내로 태어나
서울 이사 갔다 다시 대구 동도초등 전학
아버지도 음악적인 감수성 뛰어났지만
'딴따라 짓'이라며 처음엔 강력하게 반대
뮤지션으로 성공후에는 전폭적으로 지지
김승근씨 만나면서 대구에서 '공연 시작'
88년 무명시절 효성여대서 첫 단독무대
공연 수익 적어 개런티 약속대로 못줘도
"친구 사이에"라며 싫은 내색 전혀 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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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대봉동시절 찍은 것으로 보이는 가족사진. 아래줄 맨오른쪽이 김광석. 사진=친형 광복씨 제공 |
◇ 대구에서의 유년시절
김광석은 1964년 1월22일 대구시 중구 대봉동에서 태어난다.
서울 대광고 학생증에 따르면 본적은 대구시 동구 범어동 268번지로 기재돼 있다. 집 앞에 개천이 흘렀고, 범어교회가 있었다. 광석은 5남매(광나·광동·광복·광득·광석) 가운데 막내였다. 둘째 광동은 군에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광석은 훗날 대구에서 6개월 방위하던 시절 군혜택을 보게 된다. 그가 태어날 때 아버지 김수영씨(2004년 작고)는 대봉동에서 허름한 번개전업사를 꾸려가고 있었다.
그의 외가는 달성군 화원읍 설화리였다. 아버지는 8남매 가운데 장남이어서 늘 집안을 챙겨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반정부적 기질이 강한 듯 60년 5월7일 지역 초·중·고교 교원노조를 결성하는데 동참했다. 전교조 전신이었다. 당연히 정부에서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간부로 있었고 그 때문에 민주당 정권의 탄압을 받게 된다.
지역 교원 400여명이 전근 및 해고 통보를 받는다. 아버지는 이때 해직을 당한다. 호구지책으로 시작한 게 전업사였던 것이다. 아버지는 그걸 기반으로 전기공사 사업의 길로 들어선다. 하지만 선비의 기질을 타고난 아버지는 사업적으로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다. 전업사를 차리기 전에 친척이 운영하던 금은방 가게에서 일을 했다. 그런데 설상가상, 가게에 있던 회중시계가 말썽을 일으킨다. 회중시계 박스에서 북한찬양유인물이 발견됐고, 아버지는 공안당국에 의해 간첩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오명을 씻기 위해 자진해서 입대하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김광석은 자기 옆집에 가수 박학기가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지낸다. 김광석의 어머니 이달지씨(82·현재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 살고 있다)는 모란 양장점 집 여주인과 친한 사이였다. 박학기는 그 양장점에서 살았던 것이다.
김광석의 대구에서의 유년시절은 6년 남짓하다. 어린 시절 남도극장 근처와 지금은 복개된 범어천이 놀이터였다. 가끔 아버지 공사 현장 근처로 가서 어머니와 함께 기념사진도 찍었다. 현재 인천의 한 세무서에서 일하고 있는 친형 광복씨는 영화광인 아버지를 따라 남도극장에 자주 들락거렸다고 했다.
아버지는 대구사범 출신의 엘리트였고 아코디언 등 악기를 잘 다뤘다. 하지만 광석은 서울 경희중 악대부에 들어가기 전 음악 관련 이렇다 할 만한 교육을 받은 게 전혀 없다. 그냥 남다른 끼가 있어서 TV에 등장하는 트위스트 흉내를 낼 정도였다. 광석이 집안 사람들을 가장 시원하게 웃긴 건 남진이 부른 '님과 함께' 노래에 맞춰 남진 흉내를 낼 때였다.
◇ 다시 서울로…그리고 다시 대구로…
아버지의 가업은 그리 번창하지 않았다.
서울로 가야 더 사업이 탄탄해질 거라고 믿고 광석이 5살 나던 해 서울로 올라간다. 잠시 장충단공원 근처에 살다가 현재 모친이 살고 있는 창신동으로 옮겨간다. 그때까지 김광석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범어동 본가에 살고 계셨다. 아버지는 전업사 사장에서 관급 전기공사 사업가로 변신한다. 하지만 할머니의 병환이 위중하자 직접 돌봐주기 위해 대구로 내려온다. 식구가 모두 내려온 건 아니다. 광석과 누나 한 명만 데리고 내려온다. '김광석 평전'(세창미디어 간)에 따르면 72년 겨울 광석이 대구 범어동 동도초등 4학년에 입학한 것으로 돼 있다. 하여튼 김광석은 동도초등에서 1년 남짓 지내다가 다시 서울로 간다.
광석의 예술적 끼는 어디서 왔을까.
어머니는 아주 살림을 야무지게 사는 현모양처였고, 아버지는 전교조 결성을 주도할 정도로 뭔가 지식인적인 품성을 갖고 있었다. 음악적 감수성도 있었지만, 가문을 지켜야 하는 장남이란 굴레 때문에 생활에 전념한 책임감이 강한 가장이었다. 광석에게 음악적 기운을 불어넣어주지는 않았다.
대신 작은 할아버지가 한 풍류를 했다. 유명 악극인을 불러 동네잔치를 벌일 정도였다. 아버지는 광석이 명지대 시절 통기타 아르바이트 하는 걸 '딴따라 짓'이라면서 강력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그가 뮤지션으로 크게 성공하면서 그의 길을 인정하고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 대구에서의 첫 공연 스토리
대구에서 김광석 공연을 가장 활발하게 유치한 기획자는 예술기획 성우의 대표인 배성혁씨와 현재 지역의 모 언론사 사회부 기자로 활동 중인 김승근씨다.
김씨는 광석을 대구에 가장 먼저 소개했고, 배 대표는 광석의 대구 콘서트를 활성화 시켰다. 김씨는 89년 11월, 배 대표는 90년 11월, 그의 첫 콘서트를 유치한다.
김씨는 언론사에 들어오기 전 지역 공연기획문화를 주도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87년 여름, 서울 홍대 앞에서 그때까지만 해도 동물원 시절 '거리에서' 정도로 이름을 내고 있던, 무명이나 마찬가지인 그를 만나 대구에서의 공연을 타진하고 내려온다. 광석은 이때 자신과 성향이 별로 맞지 않은 동물원과 섞여 나름대로 입지를 확보하고 있는 상태였지만 자기 기질을 완전하게 뽑아내지는 못하고 있는 처지였다.
88년 10월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 가을 축제 때 김씨가 그를 초대가수로 부른다. 그때 광석은 김씨한테 "이런저런 일로 대구에서 노래를 불렀지만 단독으로 초대돼 내려가는 건 이번이 처음"이란 말을 한다. 광석은 하얀색 프라이드를 직접 몰고 축제장으로 내려왔다. 사회자도 광석의 인지도가 그다지 높지않아 그냥 소개하면 반응이 별로 일 것 같아 "'거리에서'를 부른 김광석" 정도로 덧칠을 했다.
원래 세곡만 부르게 돼 있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광석은 자기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했고, 객석의 반응이 달아오르자 그도 무척 고무돼 무려 40분 동안 끼를 분출시킨다. 광석의 1집 음반은 88년에 나온다. 가요계에 나온 건 84년 김민기의 '개똥이' 음반에 참석하면서부터다. 87년 군 제대 직후인 광석. 대구에서 그 누구도 언더 가수였던 그를 몰랐으며, 알아도 그가 대구 출신임을 아는 이도 전무하다시피 했다.
다음해 6월쯤 다시 내려온다. 대구대 대명동 캠퍼스에서 '사랑이 떠나간다네'를 부른 김종찬을 메인으로 하고 그 옆에 댄스가수 박남정을 끼우고 그 분위기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데도 그가 게스트로 무대에 오른다.
김씨는 당시 가수 김종국씨(현 중구 문화원 사무국장)와 함께 공연기획사 '초화'의 대표로 있었다. 김씨는 그날 인간적이고 대범한 광석의 기질을 발견하게 된다. 도시락을 시켰는데 자기가 먹어보니 살짝 상해서 광석에게 먹지 말라고 하니, 광석이 빙그레 웃으며 "먹고 안 죽으면 되죠"라면서 전혀 내색하지 않은 채 묵묵히 다 먹는 것에 반해 그를 좋아하게 된다.
더 짠한 에피소드 하나. 금호호텔 크리스탈 볼룸에서 이틀 동안 4회 공연을 했다. 1회 공연료로 100만원을 주기로 돼 있었다. 그런데 홍보 부족인지 객석이 별로 차지 못했다. 친구나 다름없는 김씨가 그에게 아주 미안해 하며 "공연수익이 별로여서 100만원밖에 주지 못할 것 같다"고 하니, 그는 "친구사이인데…"라면서 다른 가수들과는 달리 전혀 개의치 않아 하면서 그 돈을 받는다.
그 다음 광석의 처신이 아주 '대인'스러웠다. 그는 수고한 스태프를 위해 그 돈을 쾌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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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직전 연습실에서 기타 튜닝을 하고 있는 김광석. 그는 공연장 뒤에서도 좀처럼 농담없이 연습에만 몰입했다. 사진=네이버 팬카페 회원'블루베리'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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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석의 생가가 있었던 중구 대봉동 남도극장 옆 네거리. 아버지는 번개전업사를 꾸려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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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석의 놀이터 중 한 곳인 남도극장. 현재는 책방으로 바뀌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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