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거주 탈북자 3인의 도문탈북자수용소 증언
2005년 겨울 중국 연변에서 바라 본 북한 회령시 전경. 가로로 길게 흐르는 강이 두만강이다. |
2012년 현재 남한에 살고 있는 북한이주민은 남자 7천명, 여자 1만6천명 등 약 2만3천명이다. 이중 대구에 정착한 동포는 763명이다. 이들은 대개 경제적 원인의 자발적 망명자다. 휴전선을 넘어 남쪽으로 넘어오는 동포도 더러 있지만 대부분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중국에 머물다 라오스·태국 등 동남아를 경유해 한국으로 입국한다. 2008년 개봉한 영화 ‘크로싱’은 이들의 아픔을 그려낸 작품이다. 하지만 영화 속 주인공보다 더 기구한 스토리를 간직한 사람도 적지 않다. 도문탈북자수용소를 경험한 탈북동포 3명의 눈물겨운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자.
북-중 국경지역 두만강에 있는 탈북감시카메라. 중국측에서 설치한 것이다. |
◆‘도문’의 악몽
도착하자마자 몽둥이 찜질에 전기봉 고문
33㎡ 좁은 공간 최대 30명 수감
차가운 시멘트바닥 온수도 안 나와
하루 7시간 면벽 움직이거나 졸면 가차없이 매질
칸막이도 없이 변기통 설치 지린내 나는 담요 한 장 주고
반찬은 먹다남은 찌꺼기 제공
◆송환 뒤의 악몽
탈북 사연도 저마다 기가 막혀…北송환 다가올수록 심리적 압박감
北으로 압송되면 보위부·단련대 거쳐…교도소 격인 집결소에 수감
하루 300개 넘는 시멘트블록 찍어…가혹한 노동에 몸무게 40㎏으로
대개 1년후 석방…고향 돌아오지만 다시 탈북 생각뿐
■ 2011년 이주 김정철(가명·32·대구시 평리동)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장백조선족자치현에서 바라본 압록강 맞은편 량강도 혜산시. 혜산시 주민들이 압록강변에서 국경수비대의 감시 속에 빨래를 하고 있다. |
내 고향은 함경북도 회령시다. 고아로 태어났다. 이름도 누가 지어줬는지 모른다. 열 세 살 때 까지 회령에 있는 한 학원(고아원)에서 생활했다.
1994년 여름부터 배급이 줄면서 배를 곯는 일이 허다했다. 하루는 열 여덟 살 먹은 형이 “여기서는 살아봤자 미래도 없고, 굶어 죽을 것 같다. 나를 따라 중국으로 가지 않칸?”이라며 탈북을 제안했다. 이에 두 명의 형과 두만강을 헤엄쳐 중국으로 건너갔다. 두만강변은 우리들 놀이터였기에 국경수비대의 감시를 따돌리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도착한 곳은 연변의 삼합 개산툰이었다. 날이 어둑해질 때까지 숲속에 숨어있다 몰래 빈집에 들어가 옷과 돈을 훔쳤다. 용정까지는 걸어서 갔다. 용정에서 한 달가량 살았다. 잠은 용문교 아래 해란강변에서 잤다. 낮에는 시장통에서 사람들의 주머니를 털고 밤에는 도둑으로 변신했다. 한 달간 모은 돈이 500위안이 됐을 때 연길로 떠났다. 연길에서도 용정과 비슷한 생활을 하다 15세 때 장춘(長春)으로 갔다. 그해 마음씨 좋은 한 한족을 만나 중학교를 다녔다.
학교를 다니면서 용접하는 일을 배웠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장춘을 떠나 다시 연길로 돌아왔다. 연길에서는 식당 요리사로 일했다. 술과 담배, 여자를 알게 되면서부터 나쁜 친구들과 어울렸다. 그래도 식당사장은 나를 신뢰했다. 연길에서 검문을 당해 두 번이나 공안국에 끌려갔다. 하지만 중국어를 워낙 잘 하는 데다 식당사장의 뒷돈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
2006년 겨울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연길의 한족 망나니들과 패싸움이 벌어져 크게 다쳤다. 하도 억울하게 당해 복수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칼로 5명의 한족을 찔렀다. 연길공안국에 끌려가 조사를 받다 결국 탈북자란 게 들통났다. 수갑이 채워진 채 다른 5명의 탈북동포와 함께 ‘빵차(미니밴)’에 태워져 도문탈북자수용소로 끌려갔다. 이런 사태에 대비해 짧은 바늘을 항상 몸에 지니고 있었다. 바늘로 몰래 수갑을 푼 다음 다른 동포의 족쇄도 다 풀어주었다. 차가 왕청의 산모퉁이를 돌 즈음 탈출을 시도했다. 산으로 뿔뿔이 흩어져 도망을 갔으나 모두 붙잡히고 말았다.
도문수용소에 도착하자마자 몽둥이찜질이 시작됐다. 전기봉으로 고문도 했다. 머리가 깨지고 이마가 찢어져 피범벅이 됐다. 나는 개처럼 얻어맞았다. 눈을 뜨니 차가운 시멘트바닥이었다. 그 후 일주일간 일어나지 못했다. 10평(33㎡)남짓 되는 감방에 15명의 동포와 함께 있었다. 보통 한 달가량 조사를 받고 북한으로 압송되지만 나는 두 달 동안 있었다. 매일 오전 6시에 일어나 7시에 아침식사를 하고 오전 8~11시, 오후 1~5시는 바른 자세로 앉아있어야만 했다. 졸거나 움직이면 바로 몽둥이가 날아왔다. 6시에 저녁을 먹고 9시에 취침을 했다. 수용소측은 무인카메라로 감시하기 위해 전등도 끄지 않았다. 아침, 저녁식사는 밥과 국이 나오고 점심은 빵이 두 개다. 세끼 모두 감방 안에서 해결했다. 양이 부족해 늘 배가 고팠다. 얇고 때에 찌든 담요를 하나씩 줬다. 변기통은 감방 안에 있었고, 칸막이는 없었다. 한겨울이라 몹시 추웠으나 온수는 제공되지 않았다. 같이 있던 노인 한 명이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북한과 중국 국경인 두만강변에 중국 정부가 설치한 밀매·환물을 금지한다는 내용의 간판. 밀무역이 성행한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
2007년 3월 북한의 온성보위부 구류장으로 이송됐다. 같이 간 동료 12명 중 9명이 전염병으로 죽었다. 이곳에서는 12시까지 잠을 재우지 않았다. 식사는 세끼 모두 커피잔 만한 그릇에 강냉이죽이다. 한입에 그냥 ‘후르륵’하고 마시면 끝이다. 우리는 그걸 ‘게사니(거위)죽’이라고 불렀다. 이가 많아 죽을 지경이었다. 한 사람의 몸에 보통 수백마리가 붙어있었다. 구류장에서 다시 단련대(노동대)로 이감돼 15일간 살다가 청진집결소(교도소)로 갔다. 이곳에서 매일 300개가 넘는 시멘트블록을 찍어냈다. 몸무게가 40㎏으로 줄어들었다. 여기서 1년간 수감생활을 하다 2008년 7월에 석방됐다. 9월에 고향 회령으로 돌아와 양로원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원장 비서가 배급 나온 식량과 물자를 빼돌려 장마당에 팔았다. 두 달간 120명의 노인 중 38명이 아사했다. 2년 뒤 원장 비서의 감시 소홀을 틈타 2010년 겨울 다시 북한을 탈출했다. 연길-쿤밍-라오스-태국을 거쳐 2011년 9월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대구에는 지난달 23일 왔다.
나는 지금까지 ‘사랑’이란 걸 모른 채 살아왔다. 인생에 있어 애정의 70%는 돈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돈을 많이 벌어 양로원을 짓고 싶다. 회령에서 죽어간 노인들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 2011년 이주 이은실(가명·32·대구시 범어동)
나는 함경북도 종성에서 1남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중·고를 마치고 함경북도 기능학교를 졸업했다. 집안은 넉넉한 편이었다. 사람들이 기능학교를 ‘함경북 돈기능학교’라고 부를 만큼 부유한 아이들이 다녔다. 거기서 재봉과 재단 일을 배웠다. 2004년 12월,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두고 친구와 함께 꽁꽁 언 두만강을 건넜다. 미리 국경수비대에 돈을 줬기에 두려움은 없었다. 중국에 가서 돈 많이 벌어 놀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늘 했다. 배가 고파서 탈북을 한 것은 아니다. 한국이 잘 산다는 소식은 다 안다. 연길에서 한 달가량 머물다 친척이 있는 허난성으로 갔다. 친척은 거기서 큰 식당을 하고 있었다. 식당일을 하다 작은 이모가 탈북했다는 소식을 듣고 2007년 3월 다시 연길로 갔다. 그러나 이모를 만난 뒤 허난성으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친구와 함께 공안에게 체포됐다. 신분증이 있었으나 가짜인 게 탄로난 것이다. 공안에게 꿇어앉아 빌었으나 허사였다. 어쩌다 이런 모진 운명을 만났나 싶어 펑펑 울었다. 탈북 2년여만에 도문탈북자수용소로 압송됐다.
수용소에 도착하자마자 친구와 함께 조사실에 불려가 짐 검사를 받았다. 남자공안 8명이 보는 앞에서 팬티까지 다 벗었다. 돈을 찾기 위해서 옷을 벗긴다고 했지만 짐승같은 눈길을 잊을 수 없다. 몹시 수치스러웠다. 내의와 지린내 나는 담요를 줬다. 밥은 이밥이었지만 반찬은 달랑 한 개. 그것도 먹다 남은 찌꺼기인 것 같았다. 좁은 감방 안에 여자 수감자 30여명이 같이 생활했다. 저마다 기막힌 사연을 가지고 있었다. 이곳에서 보름을 지냈다. 북한으로 송환되는 시간이 다가오면서 모두 불안해했다. 압송되기 하루 전날 심리적 타박을 없애기 위해 노래를 불렀다. 공안들이 시끄럽다고 주의를 줬지만 계속 부르자 구타를 했다.
날이 밝자 도문을 떠나 북한으로 압송됐다. 종성집결소를 거쳐 온성단련대로 이송되던 중 극심한 스트레스로 밥을 먹지 못해 신경성 위염에 걸렸다. 병보석으로 풀려나 고향에서 요양을 하게 됐다. 요양을 하던 중 브로커가 접근했다. 5천위안을 요구하면서 다시 탈북할 용의가 없는지 물었다. 병이 완쾌되면 다시 교화소로 갈 수밖에 없는 처지라 아픈 몸에도 불구하고 다시 탈북을 결행했다.
한국에는 지난해 6월에 입국했다. 만약 당시 위염을 앓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북한에 눌러 살지도 모른다. 반역자 집안으로 낙인찍혀 고초를 당할 부모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얼마 전 부모님과 국제통화를 했다. 두만강 부근에서는 중국전파가 잡혀 한국과 통화가 가능하다. 나는 돈을 많이 벌기보다 자유롭고 즐겁게 살고 싶다. 또 북한사람이라고 차별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북-중 국경 두만강부근에서 북한 군인들이 열을 맞춰 이동하고 있다. |
■ 2007년 이주 최정숙(실명·47·대구시 죽전동)
나는 함경북도 무산 출신이다. 북한에 혈육이 없기에 본명을 밝힌다. 90년에 결혼해 사내 아이 하나를 낳았다. 남편은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하지만 살림에는 전혀 도움이 안됐다. 궁핍한 살림에다 시어머니와 시동생까지 같이 살았다. 땔감용 나무를 해가며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아이가 다섯 살이 되던 해부터 배급이 줄어들면서 굶는 날이 많아졌다. 야음을 틈타 연변을 드나들며 밀무역을 했다. 담배도 팔고, 심지어 강아지와 물고기도 팔았다. 변방수비대의 감시를 따돌리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중간 중간 뇌물을 주기도 했다. 남편도 함께 거들었지만 남편은 번 돈을 술과 노름으로 탕진했다. 배급 사정은 전혀 나아지질 않았다. 어디에서 누가, 몇명이 굶어 죽었다는 이야기가 흉흉하게 나돌았다. 그런 가운데 남편이 두만강을 건너다 그만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국가적으로 고난의 행군시기였지만 나에게도 무척 힘든 나날이었다. 1년간 돈 벌 생각으로 아이를 동생에게 맡긴 채 2000년 탈북을 결행했다. 연길에서 온갖 힘든 일을 해가며 돈을 벌었다. 이듬해 무산으로 되돌아와 보니 동생은 행방불명이 됐고 아들은 영양실조로 병을 얻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 후 1년 동안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연길도 더 이상 가기 싫었다. 35세가 되던 해 길림성 매하구시에서 장사를 하다 한 한족 노총각을 만났다. 다리 한쪽이 불편한 사람이었지만 마음씨는 순박한 사람이었다. 조선족 동포가 많이 사는 산성진 평등촌이란 곳에서 보금자리를 틀고 딸아이도 하나 낳았다. 아이가 네 살이 되던 해 어느 날, 저녁 밥상을 차리고 식사를 할 즈음 갑자기 중국 공안이 들이닥쳤다. 남편과 시어머니는 공안의 바지춤을 잡고 살려달라고 빌고 영문도 모르는 아이는 엉엉 울면서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슬리퍼를 신은 채 매하구시 공안국으로 잡혀갔다 사흘 후 도문탈북자수용소로 이송됐다. 아이와 남편 생각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눈은 하도 울어서 퉁퉁 부었다. 수용소에는 30여명의 동포들이 잡혀와 있었다. 성폭행을 당해 임신한 16세 소녀도 있었고, 인신매매로 강제매춘을 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도 있었다. 수용소에서 열흘간 조사를 받고 국경을 넘어 북한의 온성보위부-온성단련대-청진집결소로 수감됐다. 교회를 다녔던 한 여성은 조사를 더 오래 받았다. 청진에서는 발전소 건설장에서 일을 했다. 고된 노동에다 모멸감으로 자살을 생각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인생에 머나먼 길 다함께 걸으며/ 그 어떤 비바람 헤쳐 가는 다정한 길동무가 되리/ 그 길에는 행복도 있고 슬픔도 있어/ 이겨 내리 견뎌내리 인생의 모든 풍파를’이라는 노래가 있다. 나는 한국에 오기 전까지 이 노래를 ‘이겨내리 견뎌내리 다시는 가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으리’로 바꿔 불렀다.
청진에서 1년을 복역한 뒤 석방돼 2006년 12월 다시 두만강을 건넜다. 남편과 아이를 찾아가 봤지만 이사를 가버렸다. 악착같이 찾았으면 찾을 수도 있었겠지만 포기했다. 다시 붙잡히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게 두려웠다. 이듬해 3월 인천공항에 도착해 지금은 대구에서 요양간호사를 하며 홀로 살고 있다.
나는 남과 북이 서로 비방하지 않고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다. 죽기 전에 평화통일이 돼 고향 무산에 가고 싶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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