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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대학·일반부 최우수상···이지안

2013-10-05

완전히 불행할 수 없듯, 완전히 행복할 수 없어
완전한 삶이 아닌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어…

오래 전에 헤어진 남자의 마지막 말은 “행복해라”였다. 나는 그 말을 받은 그대로는 돌려주지 않았다. 그가 불행해지길 바라서는 아니었다. 다만 ‘행복’이란 말이 어딘지 모르게 뜬구름만 같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삶이 내게 불행을 먼저 가르친 탓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느끼기에 삶은 한 순간도 완전히 좋은 일만 일어날 수는 없는 무대였다. 내가 편안히 TV를 보며 킥킥 웃고 있을 때에도 지구 반대편 어딘가에는 전쟁으로 사람이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날마다 살아가고 있었지만 동시에 날마다 죽어가고도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마냥 행복하기만 하다면, 그건 적어도 내가 원하는 모습의 나는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행복’이란 말을 일상에서 쉽게 써 버릇하지는 못했다.

내 느낌을 표현할 필요가 있을 때는 가능한한 적확한 말을 찾으려 애썼다. 누군가 뜬금없이 지금 행복하냐고 물어오면 “아니, 행불행한 것 같은데?” 라고 웃으며 되받아쳤다. 감정은 산술의 문제는 아니어서 내가 나를 정확하게 알기란 늘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원하는 삶이 행복한 무엇인가, 생각하면 어딘지 모르게 석연찮았다. 그 사실이 이따금 나를 죄인 아닌 죄인처럼 느끼게도 했다. ‘행복’을 친근하게 여기지 않고 당연히 꿈꾸지 않는 태도가 뭔가 잘못된 것 같기도 했기 때문이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은 이미 일상어였다. 사회 분위기는 더했다. 마트에 진열된 우유마저도 ‘우유는 행복입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제는 ‘국민 행복 시대’를 열겠다는 정부도 들어선 마당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행복’이란 말이 미심쩍었고 구체적인 질감으로 느끼지도 못했다. 외따로운 섬이 된 듯 외로워졌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읽으니 속이 다 후련했다. 오래 묵은 체증 같은 것이 단번에 내려가는 소화제라도 마신 기분이었다. 나는 ‘행복’의 문제에 대해 조금 남다르게 예민했을 뿐, 다른 것이 틀린 것은 아니라고 이 책이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철학자인 저자가 바라보는 이 세계의 환부에는 ‘행복’이라는 핑크빛 추상어가 어두운 표정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행복’은 이상한 이름이고 고착화된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그 말의 실체와 허상을 파고드는 간명한 언어부터가 깊은 인상을 주는 책이었다. 쉽지 않은 철학을 다루면서도 자분자분 대중적인 어법으로 접근해 한국 사회의 세태를 날카롭게 꿰뚫는 솜씨가 여간하지 않았다. 철학자이자 사회구성원으로서의 목격담이되, 그것이 인간과 사회 전반에 대한 깊은 통찰이 함께 작동되는 세계여서 더 흥미로웠다. 이 책은 ‘행복’을 은연중에 혹은 드러내어 강요받고 있는 개인과 사회적 분위기의 문제성을 지적하는데, 이 문제는 현재적인 것이기에 더 관심이 갔다.

놀랍게도 ‘행복’은 그리 오래 된 말은 아니었다. 공리주의가 발현한 200년 전부터 사용되었다 하니 ‘행복’에 대한 이 시대의 조급한 강박이 어쩐지 어리석게 느껴진다. ‘행복’이란 말은 메이지 유신 때 양적 공리주의로 알려진 벤섬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번역하면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그가 주장한 ‘최대 행복’에서 ‘행복’은 ‘쾌락’을 의미한다. 그 쾌락에는 선악이나 미추 등의 질적 판단은 들어있지 않았다. 그래서 양적 공리주의는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공리주의는 자유주의를 긍정하는 것이기에 시장주의에도 힘을 싣는다. 시장주의는 모든 것을 화폐 단위로 수치화하는 세계다. 자본주의라는 시장주의의 지배 아래 살고 있는 우리도 연봉, 아파트 평수, 연금 액수, 키, 몸무게 등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추상화하며 양화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이런 상품화, 추상화, 양화가 이미 우리의 일상인 것이다. ‘행복’은 이런 공리주의와 시장주의에 민주주의가 낳은 개인주의까지 더해져 빚어지는 문제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현대 사회는 개인은 고립되고 쾌락은 즉흥적인 시대다. 스마트폰과 SNS의 발달로 오락거리는 늘어났지만 그만큼 가짜 관계가 더 판을 친다. 기술의 발달로 인해 여론의 지배에도 더 쉽게 농락당한다. 유저가 되기 쉬운 만큼 루저도 되기 쉬운 것이다. 쉽게 이어지지만 쉽게 헤어지기도 쉬운 관계들은 허탈한 것이기에 불행을 느끼게 한다. 돈과 힘이 지배하는 체계에서 사는데도 개천에서는 용이 날 수 없는 가로막힌 사회구조 또한 허무감을 증폭시킨다. 이 모든 것들의 화학 작용이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행복에 대한 집착과 강박을 낳은 것이라고 이 책은 설명하고 있다. 그것을 두고 저자는 ‘행복 스트레스’라 표현했는데, 이를 주도하는 사례는 모순적이게도 ‘범람하는 멘토’의 존재들이다. 무수한 행복 상인들이 행복을 강권하는 것이 오히려 문제라는 것이다. 행복은 좀처럼 얻기 어렵고 설사 얻었다 해도 지속하기가 매우 힘들다. 그걸 알면서도 행복한 사람도, 행복하지 않은 사람도 모두 행복해야 한다고 외쳐대는 것은 행복의 문제가 개인의 마음 문제로만 국한시키기에 미봉책이 된다는 것이다. 절로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행복을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사회와 개인, 그리고 ‘그 사이’까지 아울러 살피며 문제의 근원을 캐나가야 조금이라도 현실이 발전적인 방향으로 바뀔 수 있는 게 아닐까.

이 책은 단순한 지적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해결책도 제시하고 있다. 좋은 사회가 되려면 피라미드 구조에서 원탁 구조로 바뀌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원탁에 앉은 이들이 자진해서 자신의 부를 내놓아 공동의 부를 더 많이 조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일이 좋은 일이 되려면 자신, 가까운 사람(가족, 친구, 친척 등) 그리고 어려운 사람(모르는 사람들, 즉 사회)에게 골고루 좋아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염결한 것이어서 아름다웠다. 나밖에 모르는 사람을 만날 때의 불편함과 서운함은 이 사회와 인간을 자주 절망으로 느끼게 했다. 그럴 때면 상대를 더 이해하려 애쓰거나 더 오해하며 애써 잊었다. 수행되지 못한 내 마음의 문제려니 나를 탓하기도 수 차례였다. 그러나 어떤 문제를 긍정도 부정도 아닌 있는 그대로 보려는 태도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저자의 말은 그간의 내 생각을 돌아보게 했다. 단순히 내 마음의 자세를 바꾸고 관점을 바꾼다고 해서 세상이 완전히 바뀌는 건 아니라는 것. 나는 이 명료한 탁견에 죽비라도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혼자 살 수 있는 사회는 없다는 점을 나는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혼자서 몰래 하는 고행만이 답이 아니라, 개인과 사회 모두의 내부에서 소리 없이 한걸음씩 진행되는 변화가 해결책이라는 이 주장은 신선하고도 사려 깊다. 다시금 나와 이 사회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작은 동력이 되었다.

무엇이 얼마나 있으면 ‘행복’이란 말로 설명될 수 있는지 나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돈, 외모, 학벌, 명예 등속의 잡다한 것들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도 믿지 않는다. 삶은 행복만의 전유물은 아닐 것이다. 누구도 완전하게 불행할 수 없듯이, 완전하게 행복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완전한 삶이 아닌 온전한 삶을 꿈꾼다.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다. ‘남들처럼’ 살아야 정답이 되는 스트레스로부터 스스로를 옥죄는 ‘행복’이 아니라, 그냥 나다운 삶을 좋은 방향으로 데려가고 싶다. 전에는 단 한 사람만이라도 사랑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그때의 생각이 조금은 설익은 것이었음이 분명히 알아진다. 단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것, 단 한 송이 꽃에서만 향기를 맡는 것. 그것은 어쩌면 자명한 불행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꽃은 한 송이지만 여러 송이이기도 한 것처럼, 사람도 한 사람이면서 여러 사람인 것을 잊지 않을 때, 거기에 비로소 인간의 희망이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한 사람의 개인이지만 ‘당신’과 ‘우리’ 사이에 놓인 개인인 것을 잊지 않고 싶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는 이렇게 읽었다고 써보는 것은 결국 잘 모르는 그것을 더 정확하게 알고 싶다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어려운 철학과 본질에 대한 성찰은 조금 힘에 부치는 것이기도 했지만, 사회 현상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지닌 철학자의 속내를 읽을 수 있어 고마운 마음만은 엄연하다. 덕분에 ‘행복’이란 말을 수상히 여기며 부러 행복을 꿈꾸지도 않았던 내가 지구에 몰래 숨어든 외계인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져 다행스럽다. 행복한 삶이 아니라, 좋은 삶을 온전하게 잘 살아보고 싶다.


수상 소감

“비가 또 내려도 내 마음의 땅이 단단해질 것 믿어”

상이라는 이름의 화려함은 수상자의 부족함을 잠시나마 용케 감춘다. 그러나 별이 빛나 보이는 건 어둠이 더 많은 배경으로 숨어있기 때문임을 모르지 않는다. 수상 소식을 들은 내 마음이 부족하다는 문장 곁에 가만히 눕는다. 부족함은 일생 나를 떠나지 않을 불멸의 애인 같아서 지겹도록 나를 부끄럽게 한다.

남의 책에 대해 말하는 일은 늘 조심스럽다. 그럼에도 이렇게 읽었다고 써보는 것은 책이 남긴 희미한 느낌이 희원의 풍경으로 또렷해지길 바라는 마음 때문일 게다. 좋은 책은 비오는 날의 우산 같았다. 외롭다는 문장을 쓰고 있을 때의 나는 외로움에 젖지 않았다. 영문도 모른 채 쏟아지는 세상의 빗방울에 당혹감을 느낄 때, 만 가지 책들은 내 삶이 흠씬 젖지만은 않도록 색색의 지붕이 되어 주었다. 물론 단 한 방울의 비도 맞지 않게 하는 완벽한 우산은 없었지만, 적어도 책을 읽고 있는 동안은 어떤 비도 내 생의 자유의지를 묶어놓진 못했다.

삶도 시간이라는 빗물 위에 써보는 독후감 같은 건 아닐까. 느낀 대로 쓰려 애써도 시간은 모든 것을 굴절시킨다. 덕분에 나는 자주 잘못 읽고 쓴다. 삶의 오독이 사람인지 사람의 오독이 삶인지 헷갈리지만, 함께 행복해도 좋을 삶은 함께 불행해도 좋을 사람임을 알아간다. 나에게만 비가 내리지 않길 기도하기보다는 내일도 내릴 비에 존재가 떠내려가지 않길 바라며 살고 싶다. 비는 또다시 내릴 테지만, 그때마다 내 마음의 땅이 단단하게 아름다워질 것을 믿는다. 미욱한 글에 씌워주신 고마운 격려에 고개 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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