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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들이 잠꼬대하는 소릴 들어보세요. 멋진 꿈을 꾸고 있는 게 분명해요! 아, 정말 아름답지 않나요? 아침이 있다는 건 정말 멋진 일 아니에요?”
매 순간 세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며 유난히 쾌활한 목소리로 끊임없이 재잘대는 이 사랑스러운 아이는 바로 열한 살의 말라깽이 소녀 ‘빨강머리 앤’이다. 풍부한 상상력으로 흑백의 침울한 주변을 유채색의 환한 세상으로 변화시키는 앤은 사실 태어난 지 석 달 만에 부모를 여의고 모든 이들로부터 외면당하며 살아온 외롭고 정에 굶주린 고아다. 이 아이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 절망스러운 구렁텅이를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세월호 사태를 겪으며 안타깝고 유감스러운 것은 그 어떤 상상과 환상의 방어막도 없이 악몽 같은 현실에 너무 오래 노출된 점이다. 방사능에 노출된 피폭자처럼 깊은 정신적 상흔이 회복되기까지 앞으로 겪어야 할 고통의 시간이 더 심각하고 걱정이 된다. 유례없는 비극적 사실도 이미 충격적인데, 사건 발생 이후 뉴스특보로 종일 뿌려대는 선정적 이미지와 과잉 정보는 자괴감, 무력감, 분노와 불안감을 한층 더 심화시키고 있다.
사실상 국민 대부분은 진도 현장에 있지 않았다. 단지 대중매체에 노출된 채 그들이 뿌려주는 이미지와 사실을 공통 경험한 것이다. 몇 차례의 무책임한 오보정정을 접하면서 집단 후유증을 겪는 국민이 실재와 유리된 담론의 기호 속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기분이 든다. 시간이 갈수록 실재는 가라앉고 이미지와 기호만 무성히 재화돼 부유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프랑스 사회학자 보드리야르가 진단하듯 기호와 정보의 과잉공급은 결국 난센스의 유희로 전락하고 광분의 단계를 거친 대중은 종래에는 신뢰성과 생명력을 잃은 보도에 마침내 침묵하게 될 것이다.
지금도 상황은 종료되지 않은 채 상처를 심화시키고 있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수용소에 잡혀가면서도 어린 아들에게 충격적인 현실을 알리지 않기 위해 끝내 놀이로 위장하던 아버지의 속 깊은 사랑은 가슴 먹먹하게 아름답다. 더 이상의 파생적인 희생을 막기 위해 사랑의 힘으로 잠시 이 애통함을 삼키고 무너진 마음을 추스르자. 그리고 너무 천연덕스럽게 아름답고 푸르러 더욱 슬픈 저 오월의 빛을 묵묵히 직면하자.
안정인 <문학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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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푸르러 더욱 슬픈](https://www.yeongnam.com/mnt/file/201405/20140512.010230749500001i1.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