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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서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나는 40여년 전 자식들 교육문제로 대구로 나왔다. 아내는 고향인 성주와 가까운 지금의 ‘다사’나 ‘성서’에서 살자고 했지만, 나는 범어네거리 주변을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내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범어네거리 근처에는 정미소가 있었고, 수성들판은 대부분 농토였다. 광활한 수성들판을 볼 때마다 가슴이 뻥 뚫리는 희열감을 느꼈다. 들녘에 파릇한 싹이 돋아, 수확기가 되어 넘실거리는 물결을 이루기까지 수성들은 사시사철 늘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특히 범어네거리 근처에 정착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존경하는 이상화 선생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 등장하는 들녘의 모티브가 된 곳이 바로 수성들이었기 때문이다.
그즈음 나는 매일 집에서 수성못까지 수성들을 걸으며 상화의 시를 암송했다. 수성들이 연출하는 경이로운 풍경을 보면서, 상화의 시혼을 느끼는 것은 내게 주어진 큰 축복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주택개발의 바람이 불면서 수성들은 빌딩과 주택으로 채워졌고, 자연히 나의 발걸음도 뜸해졌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몇 년 전 나는 신문에서 수성못둑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시비가 세워졌다는 기사를 읽었다. 거의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제는 주택가가 된 옛날의 그 수성들길을 단숨에 달려갔다. 상화의 시비를 보고 말겠다는 욕심이 나의 심장을 마치 거선의 기관처럼 뛰게 한 것이다. 드디어 수성못에 도착했는데 수성관광호텔과 마주보는 못둑에 집채만 한 바위가 놓여있었다. 청옥빛 수성못물을 내려다보며 우리 민족의 혼이 힘차게 노래하고 있지 않은가. 그날은 마침 바람이 불어서 수성못 물은 계단물결이 되어 춤을 추고 있었다. 나의 시흥도 늙은 가슴에서 붉게 뜨겁게 불타올랐다.
지난 5일, 상화고택에서 민족시인 상화의 시혼과 민족정신을 기념하는 ‘상화문학제’가 열렸다. 지역의 문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상화가 남긴 주옥같은 시를 낭송하고, 그의 문학정신을 기리는 ‘이상화 시인상’ 시상식도 함께 가졌다. 이처럼 상화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행사들이 대구에서 좀 더 많아지면 좋겠다. 그리하여 대구는 물론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상화의 흔적을 찾아 대구로 몰려온다면 정말 흐뭇할 것이다.
배철<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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