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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은 비스듬할 것이다. 공기색은 시시각각이겠지. 하늘은 수천 길 깊어야 한다. 논이 있었으면 좋겠다. 강보다는 호수가 나을 것이다. 오후 3시쯤의 햇살을 받는 코스모스를 기억한다. 음악은 끄는 게 좋겠다. 창문은 꼭 내려야 한다.
눈을 감으면 내가 기억하고 있는 가을길 풍경이 손에 잡힐 듯하다. 햇살이 맺혀 부서지는 억새풀 솜꽃을 황홀하게 바라본 적이 있다. 가을 시골길을 드라이브하고 어슬렁거리는 빈 걸음이야말로 그리워할 일이다.
입추를 지나 가을이 오고 있다. 현실은 그렇지 못하지만 가을엔 한없이 게을러지고 싶다. 햇살 눈부신 가을날 빈 걸음을 걸으면 그보다 좋을 순 없다. 소요(逍遙), 슬슬 거닐며 산책하는 일은 우리 삶을 훨씬 풍요롭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산책하면서 사색하도록 하는 교육을 했다고 한다. 이른바 ‘소요학파’다. 우리나라의 많은 유명한 길 중에 과거를 보러가던 선비가 청운의 꿈을 안고 걷던 문경새재 길은 그저 관문이 아니었다. 영남의 선비들은 그 길을 지나야했다. 문경새재를 걸으며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정리되었을까.
일본의 교토대 근처에는 ‘철학의 길’이 유명하다. 2.5㎞ 정도의 이 길을 니시타니 기타로가 늘 사색하며 걸었다. 교토학파가 태동된 길이라고 하니 가히 ‘철학의 길’이라 할 만하다. 퇴계선생이 산책했던 도산서원 둘레길은 솔숲 사이로 한 발 한 발 내디디는 발밑의 느낌이 적당히 폭신하고 안동호 물위로 반사되는 햇빛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다. 한적한 길을 혼자 걷는 일은 인생의 큰 즐거움이다.
생각해보면 한 해 동안 어슬렁거리며 걷는 일이 몇 번이나 있을까. 몇시까지 가야 하고, 언제까지 무엇을 해야 하고, 이 일을 하고나면 다른 일이 기다리고 있고, 가쁜 숨으로도 모자랄 때가 허다하다. 그럴 때일수록 한가히 거닐고 싶은 맘이 간절해진다.
필자가 좋아하는 몇 군데 길이 곧 일년 중 가장 아름다울 때가 가까워진다. 열심히 직장을 다니고 아이를 키우고 더러는 부모님을 찾아 뵙고 평범하기 그지없이 살고 있지만 불현듯 나 자신에게도 조금의 보상을 해주고 싶을 때가 있다. 어느새 무뎌지고 멍해지고 말았지만, 가을 어느날 불쑥 그 길에서 빈 걸음을 걸어야겠다. 감성 돋는 가을날 소요가 그립다.
권오준<대구문화재단 문화사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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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가을 소요](https://www.yeongnam.com/mnt/file/201408/20140829.010180738560001i1.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