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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윤 <도예가, 득명요 예토 도예대표> |
8천여 년의 한국도자기 역사 가운데서 200여년 동안인 14세기 중엽부터 16세기 중엽까지 만들어졌던 분청사기는 한국인의 감정을 구김살 없이 보여 주는 그릇이다.
청자나 백자에 비해 제작시기가 유독 짧아서일까. 초등학생들도 도자기하면 고려청자나 조선백자로만 알고, 분청사기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다. 분청사기는 한국미술의 특색을 잘 보여줘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서민용 그릇이라 할 수 있다. 또 제작기법이나 표현방법이 투박하면서 자유분방하여 민족자기라 불린다.
14세기 고려말의 국가정세는 불안하고 혼란해서 전라도 강진, 부안을 중심으로 만들어지던 상감청자도 그 정형을 잃어갔으며 국가보호와 배려를 받지 못한 기술자들은 전국으로 살 길을 찾아 흩어졌다. 이처럼 여러 지방으로 퍼져 나간 기술자들은 소규모의 가마를 만들어 도기 제조를 시작했는데 바로 이러한 가마에서 분청사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어떤 제한된 규제나 형식을 벗어나 자유로운 도자기가 전국 각지의 가마터에서 개인에 의해 제작되었다. 상감청자의 전통에 기본을 두고 있지만 달라진 환경과 변화된 기술자들의 의식, 수요층의 변화 등으로 분청사기라는 새로운 그릇을 만들어졌다.
금속기의 사용을 금지하고 대신 자기와 목기의 사용을 권장하여 분청사기의 제작은 전국으로 확산돼 갔고 국가로부터의 강력한 규제가 없었기 때문에 더욱 활발히 제작됐다. 그런데 제한된 형식과 규제없이 자유로운 작업(?)으로 인해 그릇이 조잡해지는 경향을 보이자 세종 3년에 다음과 같은 조처가 취해졌다.
“진상하는 모든 그릇을 단단하게 만들지 않아 오래가지 못하고 깨진다. 앞으로는 그릇 밑에 장명(匠名)을 쓰게 하여 후일을 증거로 삼고자 한다. 주의하지 않고 함부로 만든 자의 그릇은 물리도록 하겠다.”
현재도 분청작업을 하고 있는 많은 도예가들이 있다. 그들은 그릇 밑에 자신의 사인을 하거나 낙관을 찍어 자신의 작품임을 확인하고 있다. 조선 세종 때의 조처를 보면서 단순히 사인이나 낙관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 문화에 맞는 분청자기를 만들어야 됨을 스스로도 자각하곤 한다. 그래서 작업에 대해 더 연구하며 몰두하고 있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분청사기. 한국문화를 대표하는 도자기가 분청사기임이 새삼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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