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모죄 연루 가문 몰락후 지탱할 수 있게 만든 그림…턱을 괴고 앉아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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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정 ‘선동도해’, 종이에 수묵담채, 27.3X45㎝, 18세기, 간송미술관 소장. |
묘비명은 돌에 새긴 평전(評傳)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의 묘비명에서 한 사람의 인생을 읽는다. ‘50년간 하루도 붓을 쥐지 않은 날이 없었다. 궁핍하고 천대받는 괴로움이나 모욕을 받는 부끄러움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귀신도 감동시킬 경지에 이르러 멀리 이국 땅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1707~1769)의 묘비명이다. 그의 인생이 한눈에 들어온다.
심사정은 살아서는 어려운 삶을 살았지만 후세에는 성공한 화가로 인정받았다. 그의 작품 ‘선동도해(仙童渡海)’를 보면, 파란 많은 생애를 실감할 수 있다. 꼭 달마대사의 유년시절을 연상시킨다. 주인공이 마치 달마가 된 듯 깊은 사색에 잠겼다. 발치에서 이는 파도와 고요한 포즈의 대비에 깊게 빨려드는 매력이 있다.
심사정은 인조반정의 일등공신인 심지원(沈之源)의 증손자로 명문가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죽창(竹窓) 심정주(沈廷, 1673~1750)는 포도 그림을 잘 그렸으며, 집안 대대로 예술에 조예가 깊었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심사정은 할아버지 심익창(沈益昌)이 역모(逆謀) 죄에 연루되어 하루아침에 멸문지화를 당한다. 그의 나이 18세 때였다.
조선시대 역모로 낙인찍힌 가문은 평생 죄인이 되어 살아야만 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던 그에게 그림 재주가 있었다. 어느 누구도 그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묘비명의 구절처럼 외면받고 천대받는 인생이었다. 조선시대 후기를 수놓은 뛰어난 그림을 그렸지만 그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 다행히 7촌 손자 심익운(沈翼雲·1676~?)이 쓴 ‘현재거사 묘지명’이 있어 심사정의 행적을 들여다볼 수 있다. ‘거사는 태어나서 몇 해 안 되어 홀연히 물체 그리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되고, (중략) 어렸을 적에 겸재 정선(鄭敾·1676~1759)에게 그림을 배워 수묵산수를 그렸는데.’ 그의 그림에 대한 이력이다. 어릴 때부터 그림에 두각을 보였고, 정선에게 그림을 배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직업화가로 나서서는 수많은 중국 명화를 따라 그리거나 중국의 목판본 화보집을 참고하여 조선시대의 남종화를 개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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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정은 18세에 가문이 박살 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삶을 산 듯하다. 이가환(李家煥·1742~1801)이 기록한 “현재는 성품이 몽매하고 세상 물정에 어두운 숙맥이었다”는 점으로 보아, 세상사와 담을 쌓고 지낸 것 같다. 일찍이 인생의 덧없음을 터득한 그는 직업화가로 생계를 잇는 고독한 삶을 살았다. 그를 지탱한 것은 그림이었다.
하늘은 무심하지 않았다. 심사정이 비록 몰락한 양반이었지만 대수장가이자 감식가인 상고당(尙古堂) 김광수(金光遂·1699~1770)와 석농(石農) 김광국(金光國·1727~1797)이 그를 후원하였다. 출중한 그림실력을 겸비한 심사정의 재능을 알아본 것이다. 그들이 소장한 중국의 화보집과 그림을 감상하며, 심사정은 자신의 회화세계를 넓혀갔다. 또 진경시의 대가 사천 이병연(李秉淵·1671~1751)도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누구도 심사정의 작품에 화제를 써주지 않았지만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1713~1791)은 달랐다. 심사정의 그림을 높이 평가하여 붓을 들었다. 1761년, 55세인 심사정과 49세인 강세황은 서로 그림을 모아서 ‘표현연화첩(豹玄聯畵帖)’을 만들 정도로 사이가 돈독했다. 화가이자 그림비평가인 강세황은 “현재가 겸재보다 더 낫다. (중략) 그는 그림 분야에서 못하는 것이 없지만, 화훼와 초충을 가장 잘하였고, 그 다음이 영모, 그 다음이 산수”라는 평을 남겼다.
‘선동도해’는 어린 신선이 갈대 위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서 생각에 잠긴 그림이다. 지그시 감긴 눈은 먼 곳을 향한다. 사색은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힘이 있다. 그래서 사색은 인간을 숭고하게 만든다. 세속의 시간이 파도를 일으켜도, 갈대는 천상의 날개가 되어 어린 신선을 보필한다. 법열에 드는 순간, 그 어떤 경계도 범접할 수 없다.
수묵담채로 그린 이 작품은 어린 신선이 바다를 건너가고 있는 모습이다. 무릎에 반쯤 웅크린 어깨가 조붓하다. 눈썹은 새싹처럼 파릇한데, 눈은 웃고 있다. 짙은 먹색의 옷은 소박하고, 드러난 발이 낯빛처럼 해맑다. 대충 그은 듯한 필선이 대가의 기운으로 충만하다. 그래서일까. 날아갈듯 그린 갈대 잎이 단단하다. 일렁이는 파도는 바람 같은데, 신선의 세계가 더없이 담백하고 맑다.
조선시대 후기 화단에는 진경산수화와 풍속화가 대세였다. 그런 시류에 얽매지 않고 심사정은 중국 남종화를 깊이 습득하여 조선시대의 남종화로 정착시켰다. 그의 묘비명이 더 빛나는 이유다.
화가인 나의 묘비명을 그려본다. 처절하지도 않은 나는 어떤 묘비명으로 남을까. 심사정처럼 ‘하루도 붓을 들지 않은 날이 없을 정도’로 그림에 매진한다면, 화가로서 부끄럽지 않은 인생이 되겠지만 어디 그게 쉬운 일인가. 그저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할 뿐 평가는 내 몫이 아니다. ‘선동’처럼 지긋이 그림을 본다.
화가 2572k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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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심사정 ‘선동도해(仙童渡海)’](https://www.yeongnam.com/mnt/file/201908/20190823.010390823110001i1.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