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내리듯 약을 달이는 가을의 한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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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인문 '선동전약', 종이에 담채, 30.8×41.5㎝, 간송미술관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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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희 (화가) |
짙은 갈색 알갱이들 위로 기포가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물이 닿자 사각사각 커피 뜸 들이는 소리가 난다. 그 소리가 맑아서 한참을 들여다본다. 내려진 커피는 은은하게 퍼진다. 옛사람들이 찻물을 끓이며 마음을 다스렸듯이 나는 커피를 내리며 마음을 다듬는다.
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 이인문(李寅文, 1745~1824)의 작품 '선동전약(仙童煎藥)'에는 더벅머리 소년이 바리스타처럼 약을 달이고, 웅크린 사슴이 물 끓는 소리에 귀를 열고 있다. 신령스러운 기운이 감돈다. '선동전약'은 '소년이 약을 달인다'는 뜻이다. 사실적이면서 사의적인 면을 절충한 이인문의 아치가 풍겨지는 작품이다.
이인문은 역관을 지낸 중인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그림에 두각을 보여 도화서 화원이 되었다. 그 후 왕이 관리하는 '차비대령화원'으로 발탁되어 38년간 궁중화원으로 근무한다. 동지겸사은(冬至兼謝恩)의 수행화원으로 두 차례 북경을 다녀오기도 했다. 북경에서 접한 선진문화는 그의 예술세계를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사행에서 보고 체험한 것을 그린 20점의 작품을 엮은 '한중청상첩(閒中淸賞帖)'을 남겼다. 화첩에는 낙타, 양, 말 등의 동물과 서역인의 모습을 서양화풍으로 그린 것들이다. 작품 대부분의 화제를 간재(艮齋) 홍의영(洪儀泳, 1750~1815)이 써서 더 관심을 모았다. 홍의영은 시와 글씨에 능하고 행초(行草)를 잘 쓴, 탁월한 감식안이었다.
이인문은 진경산수화가 화단을 풍미했지만 사실화에 안주하지 않았다. 대상의 재현보다는 자신의 해석과 감흥을 중시한 남종문인화풍의 작품을 그렸다. 그의 고사인물화는 주로 한시나 문학을 소재했고, 도교나 불교적 소재에 산수화가 결합된 독특한 형식의 도석인물화를 구현하기도 했다. 사의적인 면모를 보이면서 격조 높은 탈속의 세계를 담았기에 이인문의 회화는 왕을 비롯한 당대 예술애호가들에게 높은 평가와 주목을 받았다. 비평가이며 화가인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은 이인문의 산수화를 보고 "그의 산세가 곽희의 운두준법을 얻었다"고 평하기도 하였다.
'한중청상첩'에 장첩되어 있는 '선동전약'은 중국의 고사에 등장하는 청오자(靑烏子)를 그린 고사인물화다. 청오자는 한나라 사람으로 800년을 산 팽조(彭祖)의 제자이다. 스승의 도를 전수 한 청오자는 화음산에 은거하다가 471세에 금액(金液)을 마시고 승천했다고 한다. 청오자는 화가들에게 단골 소재로 다루어졌는데, 주로 지팡이를 들고 사슴을 대동한 신선차림의 노인으로 묘사되었다. 그런데 이인문은 더벅머리 소년을 등장시켜 사실적이면서 서정적인 감성을 가미하였다.
'선동전약'에는 화로 위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더벅머리 소년이 쪼그리고 앉아 부채로 숯불을 피우고 있다. 소년 옆에는 화려한 뿔이 달린 사슴이 엎드린 채 소년을 쳐다본다. 멀리 폭포수가 장쾌하게 떨어지고 절벽은 안개 속에 묻혔다. 소년의 머리 위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멋스럽게 가지를 드리우고 있다. 소나무 아래쪽에는 영지버섯이 상서로운 기운을 전한다. 소년과 사슴 사이에 두루마리 경책이 놓여 있고, 소년은 약을 달이는 틈틈이 책에 눈길을 준다.
소년 청오자의 옷을 거칠고 강한 선으로 자연스럽게 묘사하였다. 사슴은 표정이 온순하고, 뿔은 수려하면서도 상징적이다. 화면 왼쪽에는 소나무 둥치가 왼쪽으로 우람하게 뻗어 올랐고, 가지는 오른쪽 아래 사선으로 휘어져 공간의 변화를 주었다. 사실적인 소나무 이파리를 대범하게 처리하여 인물과 조화를 이룬다. 여기서 이인문의 호 '고송유수관도인'이 겹쳐진다. 그 뜻은 '늙은 소나무, 흐르는 물을 마음에 담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이 그림 속의 소나무와 흐르는 폭포, 그리고 약 달임에 마음을 다하는 소년은 이인문 자신을 은근히 암시한 것은 아닐까. 그러고 보면 '선동전약'은 이인문이 자신의 심상을 그린 작품 같기도 하다. 화면 왼쪽에는 홍의영이 쓴 "너와 사슴이 다 함께 잠들면 약 달이는 불길이 시간을 넘기리라"라는 화제(畵題)가 있다.
약은 시간을 우려낸 정성이다. 모든 일은 정성과 열정의 기다림이 필요하다. 나는 '선동전약'의 소년이 되어 약을 달이듯 커피를 내린다.
화가 2572k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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