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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지대] 뿌리내리는 중이랍니다

2025-02-24
[단상지대] 뿌리내리는 중이랍니다
이은미 변호사
중국 극동지방에서 자라는 '모소 대나무'라는 대나무가 있다. 희귀종 대나무라서 농부들이 씨를 뿌려 가꾸는데 이 대나무는 4년 동안 단 3㎝밖에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이 모소 대나무는 5년이 되는 해에 폭풍성장을 한다. 매일 30㎝씩 성장하며, 6주 만에 12m 이상이 자란다. 그리고 27m까지 자라서 6주 차가 되면 울창한 숲을 이루게 된다.

어느 날 폭풍 성장을 하는 모소 대나무를 본 사람에게는 이 대나무가 짧은 시간에 갑작스러운 성장을 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모소 대나무는 4년간 땅속으로 계속 뿌리를 내리며 밑으로 자라고 있었다. 모소 대나무의 뿌리는 수백m까지 자라고 모소 대나무 숲의 뿌리들은 서로 얽히고설켜서 서로의 뿌리로 단단히 자신을 고정시킨다고 한다.

드러나는 성과는 없지만 모소 대나무는 침묵을 지키며 자신을 단단하게 지탱해 줄 뿌리를 내린다. 아주 높이 솟아도 튼튼하게 받쳐줄 뿌리가 완성되면 비약적인 성장을 할 때가 된 것이다.

나는 주말농장 텃밭에서 상추를 비롯한 채소들을 키우고 집에서는 콩나물을 키운다. 상추는 씨를 뿌리고 나면 아주 신들린 듯이 자란다. 내가 뭘 했다고 얘가 이렇게 잘 자라 주나 대견할 때가 많다.

다른 채소들도 작은 씨앗이나 묘목에서 어떻게 이런 성장을 이루나 싶고 신기할 정도로 쑥쑥 큰다. 그렇지만 상추도, 다른 농작물도 일정한 성장을 하고 나면 멈춘다. 자기 키가 있고 한계가 있다. 다른 농작물을 심어야 해서 밭을 갈아 엎어보면 뿌리도 깊지 않다. 특히 상추는 손으로 쉽게 쑥쑥 뽑힌다. 땅에 살짝만 뿌리내리고 위로 급하게 자라지만 뿌리가 약한 만큼 오래 그 자리에 있지 못한다. 그래서 한 철 쓰임새를 다 하고 나면 밭에서 뽑히는 것이다.

상추는 급한 보람을 나에게 주었고 매주 성과물을 안겨 나는 그때마다 기뻤다. 그러나 내일 죽는다면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사람은 있어도 상추를 심겠다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상추가 주는 기쁨은 멀리 내다볼 수는 없는 기쁨이다.

콩나물은 콩을 물에 불려서 하루 지나면 싹이 튼다. 그러고 난 다음에는 거의 실시간으로 자라는 느낌이다. 콩나물은 무섭게 잘 자라서 상추보다 더 빠른 보람과 성과를 준다. '아, 이래서 콩나물 먹으면 키가 큰다고 그러는 거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뿌리가 땅에 박힌 것도 아니고 뿌리가 아예 밖에 나와 있는 콩나물은 뿌리째 수확하므로 다음을 기약할 것도 없이 상추보다 더 빨리 사라진다. 일정한 크기 이상으로는 크지 않고, 다른 싹이 나기 시작하면 먹지도 못한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콩나물은 며칠만 성장하고 생을 마감한다.

공부나 운동도 그렇고 숙련되고 전문가가 되려면 뿌리를 내리는 침묵의 시간이 필요하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살다 보면 다른 사람보다 부진하거나 늦는 것 같기도 하고, 운이 없는 것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 노력해도 달라지지 않고 성과가 나지 않을 때 조급해지거나 위축될 때도 있다. 하지만 노력에 비해 성과가 드러나지 않아도 나의 노력이 헛수고가 되거나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즐기는 사람은 따라잡을 수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사실 '잘해야 즐길 수 있다.' 잘하려면 척박한 땅에서 굵은 모래와 자갈을 만나도 이를 피하면서 계속 뿌리를 내려야 한다. 잘 뿌리 내리고 나면 그때부터는 비약적인 성장을 하면서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마음의 근육을 키우기 위해 천천히 뿌리내리는 중이다.이은미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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