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거장부터 요즘 핫한 아티스트까지…물길 따라 즐기는 미술관 투어

31일부터 11월1일까지 2025 APEC 정상회의가 열릴 경주 화백컨벤션센터 일대. 국제회의와 관광, 예술이 한 데 어우러진 '형산강 문화벨트'의 중심구간이다. 옆으로는 형산을 끼고 있고 그 너머로는 보문관광단지의 랜드마크인 황룡원 중도타워가 보인다.

'초현실주의 100년의 환상', '한국 근현대미술: 4인의 거장들' 등 굵직굵직한 기획전시가 자주 열리는 경주예술의전당 알천미술관 전경.
김환기·박수근·이중섭·장욱진 네 거장
예술의전당 내 알천미술관 특별 전시
세계적 작가 백남준·아모아코 보아포
우양미술관서 동서양 현대미술 선봬
APEC 앞둔 천년고도 곳곳 문화전시
형산강 따라 걷다 보면 일상이 예술로
오전 9시, 경주 보문단지에서 만난 우리는 제각각 의견이 분분했다. 지금 경주는 문화 전시 천국이다. 보고 싶은 귀한 전시들이 너무 많아서 '어느 미술관부터 갈 것이냐'를 놓고 우리는 좀처럼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거 알아? 이 자리에서 1500년 전에도 회의가 열렸어. 그 회의는 무조건 만장일치제였지."
이곳은 경주 APEC이 열릴 화백컨벤션센터 앞. 경주에 사는 화가는 국가의 중대사 앞에서 모두가 동의하지 않으면 결정을 내리지 않던 신라의 '화백제도'를 운운했다. 그는 '화백(和白)'이라는 말이 '화합하여 모두 하나가 된다'는 뜻이라며, 마치 화백회의를 주관하던 상대등(上大等)이라도 된 듯 점잖게 말을 이었다.
"정말 상징적이지 않아? 여기서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이 모여 합의를 이루는 국제회의가 열린다는 것. 신라의 화백이 다시 열리는 셈이야."
화백회의의 만장일치제는 소수의 의견을 묵살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구성원이 동의할 때까지 더 많은 대화와 타협을 시도하는 인내의 과정이라고도 했다. 다양한 생각을 조율하는 기술, 그것이 신라의 지혜였다.
중대한 나랏일도 만장일치가 될 때까지 서로 의견을 주고 받는데, 국제 행사를 불과 2주 앞두고 우리가 이래서 될 일인가. 경주 APEC의 성공 개최를 기원하는 뜻으로 우리도 마침내 의견 일치를 보았다. 일단 강을 따라 흘러가 보자!

알천미술관에서는 한국은 물론 세계 화단을 대표하는 거장들의 작품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서로 다른 예술의 언어가 조화를 이루는 경주의 '예술 회의장'인 셈이다.
◆색의 글로벌 회의장, 알천미술관
'그림은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툭툭 튀어나온다. 마음속으로부터…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이 밝은 거울이나 맑은 바다처럼 순수하게 비어 있어야 한다… 이런 텅 비워진 마음에는 모든 사물이 순수하게 비친다. 그런 마음이 돼야 붓을 든다.'
장욱진 화가가 남긴 말이 형산강을 끼고 있는 알천미술관 벽에 새겨져 있었다. 한국 근현대 미술을 이끈 김환기·박수근·이중섭·장욱진, 네 거장의 작품을 한 공간에서 볼 수 있는 보기 드문 기회라며 경주 사는 화가가 1순위로 꼽은 곳이 경주예술의전당 4층에 위치한 알천미술관이다.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다. 올 봄, 살바도르 달리·르네 마그리트·막스 에른스트·알베르토 자코메티 등 초현실주의 거장들의 주요 작품 100여 점이 국내 최초 단독으로 이곳에서 열렸을 때도 사실 조금 놀랐다.
"'경주에서 이런 걸 한다고?' 다들 그렇게 많이 물어. 뭘 모르는 얘기지. 형산강을 따라 걷다 보면 미술관이나 전시장이 얼마나 많은데. 우양미술관, 경주솔거미술관, 더안미술관, 오아르미술관… 아, 국립경주박물관에도 신라미술관이 따로 있잖아. 불교미술부터 현대미술까지, 경주면 다 돼!" 경주 사는 화가는, 이것이 경주를 떠날 수 없는 이유라고 했다.

통창 너머로 형산강이 내려다보이는 알천미술관의 로비는 전시 관람객뿐 아니라 시민들이 사랑하는 '형산강 전망대'다.
오후 2시가 되자 시민도슨트 김보경씨의 해설이 시작됐다. 작가의 예술철학에서부터 틈틈이 경주 유적지와 연계해서 설명해주는 다정함까지. 시민도슨트의 해설은 예술적 식견 못지 않게 경주만이 가진 문화유산을 떠올리게 하는 지역색이 묻어나서, 알천미술관에 올 때마다 기다리는 시간 중 하나다. 편안한 해설 속에는 이 전시가 경주에서 열리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미묘한 자부심 같은 것이 깃들어 있었다. 가만히 듣다 보면 경주에 와 있는 나 자신도 품격이 올라가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도슨트의 해설이 끝나고 친구들이 각자가 좋아하는 작품 앞에 머무르는 동안 나는 일찌감치 로비에 나와 앉았다. 사실 알천미술관에 오면 꼭 감상해야 하는 작품이 하나 더 있다. 미술관 로비의 커다란 통창으로 내다보는 형산강의 풍경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마다 시시각각 다른 색감을 풀어내는 그 풍경 앞에 앉아있으면 화가가 아니라도 알 수 있다. 점, 선, 질감, 공간… 계절마다 다른 회화적 언어가 모두 그 풍경 안에 들어있다. 장욱진 화가의 말처럼 그림이 그려지는 게 아니라, 툭툭 튀어나오고 있었다.
◆검은색의 안쪽, 아모아코 보아포展
형산강의 물결은 보문호로 이어진다. 2025년 전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흑인 작가 아모아코 보아포의 아시아 첫 개인전이 열리는 우양미술관이다. 전시실에 들어서자 캔버스 속 수많은 흑인들과 눈이 마주쳤는데, 그들의 강렬한 시선도 시선이었지만 그들의 검은 피부색에 약간 멍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 알게 됐다. 검은색은 단색이 아니었다. 노랑과 파랑, 갈색과 회색이 미묘하게 뒤섞여 있고, 뒤섞인 그 각각도 미묘한 파장을 그리고 있었다. 흑인의 피부색은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대체 어떤 환경에 살면 이런 색을 쓸 수 있는 것일까, 그가 살고 있는 아프리카 가나라는 나라가 궁금해졌다.
"저는 구상적인 표현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싶지는 않았지만, 추상의 새로운 방식과 결합하는 지점을 찾아가고 싶었죠. 그 모든 과정이 즐거웠어요. 결국 중요한 건, 그 순간을 즐기고 그 흐름 안에 머무르는 거니까요. 그런 흐름이 저를 앞으로 나아가게 해줘요."
전시실 한편에 놓인 인터뷰 영상 속에서 그가 말했다. '흐름 안에 머문다'는 말이 형산강을 따라 문화투어를 하고 있는 우리에게 꽤나 상징적으로 다가왔다.
"보아포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핑거 페인팅 기법이야. 물결치는 듯한 피부톤의 텍스처가 그의 손끝에서 탄생하는 거지. 보아포의 작품은 말하자면 손끝으로 찍어내는 촉각의 언어야."
화가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그럴 리가 없는데도 그림 속에서 어떤 체온 같은 게 느껴졌다.
미술관을 나서면서 뒤늦게 전시의 제목을 보았다. 'I Have Been Here Before.'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나라, 아프리카 가나가 친근해진 느낌이었다. 11월 30일까지 백남준 전시와 함께 열린다.
예술을 통해 '다름'과 '차이'를 포용하는 문화교류가 APEC 기간은 물론 이후에도 한 달 가량 계속된다니, 경주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산강을 따라 이어지는 미술관과 문화공간은 경주의 '문화벨트'를 형성하고 있다. 형산강과 보문을 잇는 경주 문화벨트의 거점인 천군복합문화공간에서는 시민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민화 전시전이 열리고 있다.
◆전통과 현대의 경계, 김민수 민화展
천군복합문화공간은 이름 그대로 전시 공간과 카페 공간을 넘나드는 곳이다. 한쪽으로는 보문호에서 덕동호로 이어지는 물길이 통창으로 가득 흘러들어오고 다른 한쪽에는 벽면 가득 전통 민화 속 상징물들이 붉고 푸른 빛으로 어른거리고 있었다.
해 지는 형산강 풍경을 감상하고 싶어 일부러 일몰 시간 즈음 찾아갔는데 그 탓일까. 익숙한 화조도, 책거리 같은 우리 민화가 이상하게 조금 낯설어 보였다. 자세히 보니 그 안에 뜻밖에도 디즈니 만화 캐릭터들이 숨어있다.
"김민수 작가는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한국 전통 민화에 관심이 많았대. 그래서 서양화와 민화의 경계를 과감하게 허문 거지."
그런데, 의외로 매우 조화롭다. 민화의 선명한 색감과 만화 캐릭터의 선명한 선이 하나의 캔버스에서 경쾌하게 어우러지고 있었다. 서양화와 민화의 경계를 허문 동시에 현대와 전통의 경계도 자유롭게 넘나드는 느낌이었다.
"사실 민화는 서민들의 삶 속에서 일종의 부적 같은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어. 호랑이를 그려넣어 액운을 막고, 까치를 그리며 좋은 소식이 오길 바라고, 건강과 복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십장생도를 그렸던 것이거든. 민화에 등장하는 복숭아·포도·닭 같은 것도 서민들의 꿈, 상징적 소망 같은 걸 반영하는 것들이었어."

신라문화제 등 시민참여형 문화축제가 열리는 경주 봉황대. 신라 왕경의 중심이었던 이곳은 도심 가까이에서 시민과 여행객이 일상적으로 즐길 수 있는 열린 문화공간이다.
예로부터 복과 안녕을 뜻하던 길상의 사물들이 형산강 문화 투어의 마지막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옆으로 석양을 품고 형산강이 흐른다.
흐름으로 머물며 여백으로 존재하는 형산강. 그 물길 속에 경주만의 문화가 이어지고 있다.
글=이은임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기획 - 경주시>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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