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의 진실과 ‘풍성한 비움’
4.8m 대작에 담은 희망의 메시지
이방인에서 해돋이 관찰자로
지난 4일 대구미술관에서 드로잉 퍼포먼스 마친 허윤희 작가가 자신의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대구미술관 제공>
대구미술관은 내년 2월22일까지 허윤희 작가의 이인성미술상 수상 기념전 '허윤희: 가득찬 빔'을 개최한다. 허 작가의 30년 예술 여정을 세 개의 장으로 나눠 펼쳐 보이는 이번 전시는, 작가 스스로에게도 '성장의 기록'이다. 캔버스 위에 목탄으로 힘껏 긋고, 또다시 지워버리기를 반복해 온 그의 작업 방식은 "영원한 것은 없으며, 순간의 진실만이 영혼으로 통한다"는 작가의 예술 철학을 그대로 보여준다. 전시 첫 날인 지난 4일, 대구미술관에서 허 작가를 만나 그의 '비움'과 '채움'의 예술 세계를 들여다봤다.
▶'허윤희: 가득찬 빔'展(전) 준비 과정의 소회를 말씀해 주십시오.
"지난해 미술상을 수상한 날도 기뻤지만, 한 해 동안 열심히 준비한 작품을 전시하고 관람객들을 만나는 이 자리가 저에게는 더 소중합니다. 상을 받은 후 석 달 동안 '왕관의 무게'와도 같은 부담감을 느꼈어요. 이 큰 전시장을 어떻게 채울까 하는 걱정에 새벽에 벌떡벌떡 깨기도 했지요. 하지만 '이것은 자기와의 싸움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나다운 것에서 최선을 다하자'라고 마음을 다잡은 후부터 편하게 임했습니다."
허윤희 작가가 대구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자신의 작품 '빙하와 도시'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빙하와 도시'는 '대구'라는 공동체가 한 배를 타고 빙하가 떠 있는 바다와 같은 현실을 헤쳐 나가야 한다는 마음을 담고 있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전시장 초입의 대작 '빙하와 도시' 제작 과정이 궁금합니다.
"높이 4.8m짜리 작품은 천고 3m인 제 작업실에서는 세워둘 수조차 없었습니다. 바닥에다 깔고 스케치를 하고, 일부분을 그리고 떼어내고, 다시 연결해서 그리는 방식으로 작업했어요. 이 작품은 미술상 수상 후 대구라는 도시를 생각하며 제작했습니다. '대프리카'라 불릴 정도로 기후 변화를 겪는 대구의 현실을 직면하면서도, 대구 시목인 전나무의 강인한 기상을 도시 위에 싣고 가는 희망을 표현했습니다. 하나의 공동체가 한 배를 타고 힘든 현실을 헤쳐 나가야 한다는 마음을 담았답니다."
허윤희 작가가 지난 4일 오후 대구미술관 선큰가든에서 목탄화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다. 허 작가는 그동안 캔버스 위에 목탄으로 힘껏 긋고, 또다시 지워버리기를 반복하는 작업방식을 이어왔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하는, '순간의 진실'을 담는 작업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많은 이별을 경험하며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영원한 것이 없다면 순간이 진실하고, 그 순간의 진실함이 영혼으로 통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순간, 현재만을 강조하는 작업을 하고 싶었어요. 수건으로 목탄을 닦고 하얗게 페인트를 칠해 원상 복귀시키지요. 이는 가치를 돈으로 평가하는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작품을 남기는 것보다 '나만의 선(線)을 획득한 화가'가 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목탄을 주로 사용하게 된 계기는.
"독일 유학을 떠날 때 물감을 다 챙겨가기 힘들어서 가벼운 목탄을 들고 간 것이 계기였습니다. 그런데 목탄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표현할 수 있었고, 더 이상 유화 등 다른 매체로 옮기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목탄은 나무를 태운 가장 근원적 재료인데, 이는 동양의 '먹'과도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선과 여백입니다. 제 근본적인 예술 철학은 동양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불교 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순환'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허윤희 작가의 '배추 ' 작품이 대구미술관에서 전시 중이다.<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독일에서의 이방인 경험과 고향으로의 회귀, 그리고 제주 이주의 여정이 작품에 어떤 영향을 주었습니까.
"28세에 독일로 떠나 9년을 살았습니다. 타지에서 '나는 누구지'라는 정체성 고민을 했고, 헤어짐을 하나의 여행으로 생각하며 '여행 시리즈'를 작업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탄생과 죽음을 관통하고 '생생한 깨어있음'을 느끼고자 '관집(Coffin House)'을 짓기도 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방인이 아닌 주인으로 살고 싶었어요. 귀국 후 첫 작업이 '배추'였는데, 독일에 있을 때 김치가 먹고 싶던 기억 때문입니다. 배추는 고향을 의미해요. 50이 넘어 유배 가듯 제주로 이주했는데 그때 새벽 바닷가를 달리다 해 뜨는 것을 보고 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었습니다. 이 생생한 경험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확신을 얻어 '해돋이 일기'를 시작했습니다."
허윤희 작가가 제주의 해돋이를 담아낸 '해돋이 일기' 시리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해돋이 일기' 작업을 통해 '색'을 다시 만나셨다고 들었습니다.
"젊었을 때 감정에 휘둘리는 것이 싫어 색을 멀리하고 목탄만 고집했습니다. 그런데 제주에서 해돋이를 하면서 색이 빠지면 안 되는 풍경을 만났죠. 자연스럽게 색을 사용하면서, 이제는 어떤 색을 써도 내 감정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성숙함을 느꼈습니다. 매일 다른 하늘을 보며 유일한 단 하나의 오늘이라는 소중함을 느끼고, 저는 매일 그 순간의 최선을 다하는 붓질을 남깁니다."
▶향후 계획은.
"화가로서 자연을 가깝게 만나면서 좀 더 자유로워졌어요. 앞으로는 회화를 더 많이 하고 싶어요. 하지만 저의 뿌리이자 정체성인 목탄 드로잉도 계속 사랑할 겁니다. 목탄의 자연성과 풋풋하고 소박함 느낌, 그런 것들을 사랑하거든요."
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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