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왕국 신라, 형산강 물길따라 내륙에서 세계로…
황금빛으로 물든 경주 안강평야. 안강평야는 형산강이 동해로 흘러가기 전 마지막으로 펼쳐지는 넓은 저지대 평야로 예로부터 경주 최대의 곡창지대였다. 형산강 하류 유속이 느려지며 범람을 반복해서 비옥한 충적토가 퇴적돼 대규모 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이 풍요의 중심에 흥덕왕릉이 자리한다는 건 우연이 아니다.
흥덕·원성왕릉, 평야 인근 자리잡아
머리 터번 두른 아랍인 무신이 지켜
원성왕, 하천정비·수로 확충에 관심
중앙아시아·페르시아계 상인과 교류
흥덕왕 시기는 해상실크로드 전성기
"왕이 왜 이런 곳에 묻혔을까? 남산 자락도 아니고, 절터 근처도 아닌데…"
호기심은 그곳에서 시작됐다. 흥덕왕릉을 향해 가는 길, 형산강을 따라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는 금장평야를 지나자 '황금들녘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주겠다'고 작정한 듯한 또 하나의 들이 펼쳐졌다. 예로부터 경주 최대의 곡창지대로 손꼽히던 곳이자, 지금도 경주 전체 농지의 절반 가량을 품고 있는 안강평야다.
"신라의 마지막 황금기, 바다로 향한 신라의 수로가 열리는 곳이 바로 여기였기 때문 아닐까?"
경주 토박이 화가의 손끝이 포항 영일만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실제로 경주 서면 인내산에서 발원한 형산강은 신라 왕경과 인접한 금장평야를 적시고 안강읍과 강동면을 거쳐 동해로 유입된다. 금장평야가 왕경(王京) 서라벌에 가까운 내륙의 풍요를 상징한다면, 안강평야는 국가적 규모의 곡창이었고 흥덕왕은 그 두 풍요의 경계선에 자리한 상징적 지점에 몸을 뉘었다.
경주 안강읍 육통리의 흥덕왕릉. 신라 해상무역의 전성기를 연 흥덕왕의 무덤은 형산강이 만들어낸 내륙의 풍요로운 평야가 바닷길로 이어지는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머리에 터번을 두른 아랍인 무신이 지키고 선 신라 왕릉이라니… 정말 흥미진진하지 않아? 경주에 수많은 왕릉이 있지만, 서역인의 얼굴을 한 무신들이 왕릉을 지키는 곳은 대표적으로 딱 두 곳이야."
둘 다 형산강이 동해로 흘러드는 곳이다. 둘 다 형산강을 끼고 평야가 발달한 곳이다. 이 평야의 곡식이 배에 실려 동아시아 바다를 건넜던 것일까? 우리의 호기심은 어느새 역사 추리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형산강 물길로 운명이 바뀐 두 왕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흥덕왕릉 초입의 솔숲. 좁은 입구를 들어서면 우거진 송림이 장관을 연출한다. 안강읍내 학교의 단골소풍 장소이기도 하다.
◆바다를 건넌 왕의 꿈, 흥덕왕
"흥덕왕은 신라의 마지막 개방기를 이끈 왕이야. 장보고 알지?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한 때가 바로 흥덕왕 시기거든. 보자, 보자… 여기 나오네. '흥덕왕 3년인 828년에 청해진 설치를 허락했다.'"
경주 형산강 투어를 시작하면서 요즘 우리는 '삼국사기' 검색 재미에 푹 빠져 있다. 세상이 어찌나 좋은지 삼국사기 전문을 인터넷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열람할 수 있고, 무엇보다 한자 투성이라 난감한 원문 판본을 한글로 읽을 수 있다. 게다가 원하는 키워드로 검색도 가능하다. '흥덕왕', '장보고' 이렇게 두 키워드를 넣자 '장보고가 해적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겠다며 청해진 설치를 요청하자 흥덕왕이 즉시 이를 승인했다'는 기록이 곧바로 나온다. 덕분에 어려웠던 역사서가 흥미진진한 이야기책으로 바뀌었다. 지금의 전남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한 장보고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서해와 남해의 해적을 소탕하고, 청해진을 국제무역 거점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당나라와 일본 사이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당의 비단이나 도자기·서역의 향료나 카펫, 일본의 금과 명주 등이 거래됐는데 신라의 수출품은 주로 금·은·세공품·그리고 인삼과 같은 약재였다.
"흥덕왕의 시대, 형산강은 더 이상 단순한 내륙의 강의 아니었을 거야. 왕은 형산강을 따라 이어지는 물길을 국가의 생명선으로 보고 이를 중심으로 내륙과 해상을 잇는 교통망을 정비했어. 당시 형산강을 통해 왕경의 조세 곡물과 물자가 동해안 항구로 실려나갔다는 연구기록(김태식, 신라의 교통로와 해상활동, 1997)도 있거든."
당시 포항 지역엔 신라의 국제무역항이었던 장기·영일포구가 있었고 형산강은 그 항구로 곡식과 공물을 실어나르는 내륙 수운로로 활용됐다. 삼국사기 흥덕왕 6년조에는 '왕이 해외로부터 귀한 약재와 비단이 들어오자 이를 궁중에서 사용하지 않고 나라 곳간에 쌓게 했다'는 구절도 나온다.
무역의 주도권이 신라로 들어오던 시기, 흥덕왕은 형산강과 바다의 흐름을 동시에 꿰뚫고 있었던 것이었다.
만추의 계절, 흥덕왕릉 앞에 서서 황금들녘을 바라보고 있자니 흥덕왕이 왜 이곳에 잠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내륙의 풍요로움과 해상의 문명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 왕경에서 시작된 물길은 결국 바다로 나아가며 신라의 시야를 내륙에서 세계로 확장시켰다. 그렇게 터번을 쓴 낯선 서역인도 긴 칼을 들고 왕의 곁을 지키게 됐을 것이다.
흥덕왕릉 입구에 서 있는 무인석. 아랍인들의 두건인 터번을 한 모양새나 복장, 이목구비까지 서역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어느 나라 사람…?"
흥덕왕릉을 호위하고 선 석상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화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거대한 솔숲 너머 마치 새로운 세계로 진입한 듯한 공간감 때문인지 그 질문이 마치 석상에게 직접 던지는 질문처럼 느껴졌다.
"흥덕왕 시기는 장보고를 통한 해상 실크로드 교류의 정점이었다고 하잖아. 그래서 이 석상은 실제 서역인의 얼굴을 본 장인들이 그 모습을 반영해서 만들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인데, 당시 교역을 위해 신라를 찾은 아랍상인과 무슬림 중에는 아예 신라에 눌러앉아 사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해."
실제로 8세기 이슬람 지리학자 이븐 쿠르다드비는 신라를 "금이 풍부하고 자연환경이 쾌적해 무슬림들이 한 번 도착하면 떠날 생각을 않는 곳"으로 묘사했다.
그리고 그와 닮은 얼굴을 한 또 다른 서역인이 형산강 물길의 남동쪽 흐름을 따라 외동평야에 서 있다.
원성왕의 무덤인 괘릉. 왕릉이 만들어지기 전에 원래는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의 모습을 바꾸지 않고 왕의 시신을 수면 위에 걸어 장례했다는 속설에 따라 '괘릉(掛陵)'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강이 넘쳐 왕이 바뀐 전설, 원성왕
형산강의 물줄기가 크고 작은 지류를 만들어내며 감포를 거쳐 동해로 뻗어나가는 지점, 드넓은 외동평야를 끼고 누운 또 한 사람의 왕이 있다. 원성왕이다. 그에게는 물과 관련된,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전설이 전해진다.
예전에는 원성왕릉을 '괘릉'이라 불렀고 지금도 지명은 여전히 괘릉리인데, 한자로 '걸 괘(掛)'자를 쓰고 있다.
"왕릉이 만들어지기 전, 원래 이 자리에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을 메우려 해도 바닥에서 계속 샘이 솟아나 봉분을 만들기가 너무너무 어려웠나봐. 그래서 왕의 시신을 바닥에 안치하는 대신 관을 거는 장치를 만들었대. 그렇게 왕의 시신을 수면 위에 '걸어' 장례했다고 해서 괘릉이라는 이름이 만들어진 거지."
죽어서도 물과 함께 한 괘릉의 주인공, 원성왕은 왕위에 오를 때도 물과 함께였다. 그의 즉위 과정에는 형산강과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알천공이 왕이 되려 했으나, 알천이 범람해 즉위를 이루지 못했다.'
삼국유사 권2 기이편에 따르면, 형산강의 지류 알천이 갑자기 불어나 왕이 되려던 알천공의 길을 막았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해 원성왕이 즉위했다는 전설이다. 이를 두고 백성들은 '강이 왕의 운명을 바꿨다'고 했다.
"신라 사람들에게 강은 단순한 물길이 아니라, 하늘의 의지를 표현하는 수단이었던 것 같아. 한마디로 강이 생명의 신이자 질서의 신이었던 것이지. 강이 왕의 운명을 좌우한다면 그것도 다 하늘의 뜻이고, 반대로 왕이 강을 다스릴 능력이 있다면 그것은 하늘이 내린 왕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여겼던 것 같아."
원성왕릉의 배수로 물줄기를 돌리기 위해 왕릉에 배수로를 따로 둔 특이한 구조다. 범람하는 형산강 탓에 죽어서도 물 가까이 묻힌 원성왕의 일화를 들려준다.
원성왕은 실제로 하천 정비와 수로 확충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삼국사기 원성왕 3년조에는 '홍수가 있어 나라 곳곳의 물길을 다시 정비하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원성왕은 범람하는 강을 다스리는 일에서 왕의 의무를 찾았다. 왕권이 흔들리던 시기, 물길을 다스리는 것은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질서를 세우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왕릉에 남겨진 배수장치가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이 수로는 단순한 배수 장치가 아니라, 왕이 다스렸던 물의 질서를 상징하는 조형물로도 해석되는 것 같아. 왕릉의 축조 기술에 '수(水)의 통치 철학'이 새겨진 게 아닐까?"
보물로 지정된 원성왕릉의 무인상과 문인상. 왕릉 무인상에 아랍인의 얼굴을 조각할 정도로 신라인들은 서역인과 활발한 국제교류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 통치 철학을 지키고 선 무신이 서역인의 모습을 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흥덕왕(42대, 재위 826~836년) 이전에 이미 원성왕(38대, 재위 785~799년)은 자신의 왕권이 '신라를 넘어 천하를 다스리는 세계 질서의 중심'임을 드러내려 했던 것은 아닐까. 원성왕 시기에 이미 신라는 당과의 교류뿐 아니라 중앙아시아, 페르시아계 상인들과도 긴밀히 연결돼 있었다. 그들에게 강은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창구였다.
저만치서 만추의 바람이 불어오자 황금빛 이삭들이 일제히 손을 흔들며 신라의 황금기를 일깨운다. 그 너머로 추수를 준비하는 농부들의 모습이 보인다. 형산강이 만든 비옥한 토양 위에서 오늘의 농부들은 여전히 강을 읽고, 하늘을 살피며 살아간다. 그들의 시간이 왕의 시간과 다르지 않다. 물의 흐름이 삶의 리듬이 되고, 강의 계절이 곧 인간의 계절이 되는 천 년의 역사가 들판에 이어져 흐른다. 곡식이 알차게 여물고 있다.
글=이은임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기획 - 경주시>
박관영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