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호주에 있는 동생에게서 연락이 왔다. 여자친구와 앞으로의 인생을 함께하기로 결심했다는 이야기였다. 시간이 이렇게 빠르게 흘렀나 싶어 한동안 멍해지기도 했다. 돌아보면, 동생과 나는 늘 잡기놀이처럼 서로를 뒤쫓고 앞서며 지냈다. 모든 면에서 나보다 성큼성큼 앞서가던 동생, 그 앞에서 말이 더디고 티키타카조차 잘 안 되던 나는 마음 한구석이 늘 시큰했었다.
그럼에도 유독 선명하게 남아 있는 추억이 하나 있다. 초등학교 고학년쯤이었을 것이다. 학년 차가 얼마 나지 않았던 우리는 처음으로 단둘이 우등버스를 타고 홍천 이모 집을 찾아갔다. 한겨울이라 버스 안에서도 냉기가 가시지 않았는데, 내 몸이 추워 보인다며 가끔씩 두툼한 손을 포개 잡아주던 동생의 온기가 지금도 또렷하다.
그런 동생이 결혼을 한다니. 기쁘면서도 마음이 복잡하게 흔들렸다. 마치 야누스의 두 얼굴처럼 나의 첫 해외여행이 믿어 의심치 않았고, 두 사람의 삶을 사시느라 수고한 엄마의 첫 해외여행에서 힘들었다.
더욱이 돌봄의 주체가 엄마인 상황에서 지인들에게 호주행 포기를 내비치기도 했었다. 물론 엄마에게 사정을 몇 번 이나 들었지만, 속상했고 가서 축하해주고 싶은 맘이 간절했다.
지금까지 엄마의 자리를 본의 아니게 독차치했던 형이 동생의 결혼은 사과의 자리이자, 제수씨 될 동생에게 고맙다고, 가족의 새출발 자리이기도 하다.
지난 3개월간의 질긴 내면싸움 중에서도 생각해 볼 지점이 있다. 왜 돌봄 제공인은 엄마(여성)이어야만 하는가? 지역 특유의 심한 가부장제의 풍토, 살아온 내력, 모습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겠지만, 사정과 사안에 따라 가족들이 함께 하는 걸 보여야 장애 당사자도 누적되는 아픔과 상처가 깊지 않을 것이다.
문득 이은미의 노래 '녹턴' 한 구절이 떠올랐다. "괜찮아 울지 말아요. 우리가 잘못한 게 아녜요/대답해 봐요,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들의 말 따윈 믿지 마요."
성인이 된다는 건 참 쉽지 않다. 그래도 살아 있는 한, 우리는 계속 배우고 쓰고 고쳐가며 자라는 것 같다. 사랑하는 동생 혁아, 진심으로 축하한다. 한국에 오면 서로 바쁘다며 미뤄뒀던 형제의 시간, 이번엔 꼭 다시 이어가자.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오래 묵힌 마음들도 나누자!
이준희 시민기자 ljoonh112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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