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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강, 형산강] 9. 형산강에 깃든 전설과 지명

2025-11-25 18:37

용강동, 황룡동, 용당리…물길 따라 오늘도 龍지명 전설 이어진다

황룡사 역사문화관에 전시된 황룡사 9층 목탑 복원 모형. 당대 최고의 목조건축 기술을 총동원해 세워진 탑은 신라가 동아시아 세계 질서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세계에 선포한 상징물이었다. 당시 신라 왕경의 중심에 위치했던 황룡사를 비롯해 형산강 물길 따라 경주에는 수많은 용이 지명에 등장한다. 강력한 왕권의 상징이었다.

황룡사 역사문화관에 전시된 황룡사 9층 목탑 복원 모형. 당대 최고의 목조건축 기술을 총동원해 세워진 탑은 신라가 동아시아 세계 질서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세계에 선포한 상징물이었다. 당시 신라 왕경의 중심에 위치했던 황룡사를 비롯해 형산강 물길 따라 경주에는 수많은 '용'이 지명에 등장한다. 강력한 왕권의 상징이었다.

우동, 목소리, 발리, 목도리, 대가리… 배달음식을 시켜먹다가 우리는 대폭소를 터뜨렸다. 이게 실제로 존재하는 동네 이름들이라니!


이곳은 경주 사는 화가의 작업실. 작업실 한가운데 놓인 매우 거대한 탁자의 유리 아래에는 세계지도, 한국 전도, 그리고 경주 지도가 나란히 배치돼 있었는데 우리는 탁자 한가운데, 한국 전도 인근에서 밥을 먹던 중이었다. 하필 '대가리' 지역에 짬뽕 국물이 튀었고, 그 국물을 닦아내다 우리는 뜻하지 않은 지명 여행을 떠나게 된 것이었다.


"대체 이런 지명들은 어떤 사연을 갖고 있는 걸까?"


같이 밥을 먹던 문화기획자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질문을 던지자 경주 사는 화가는 슬쩍 밥그릇을 옆으로 옮겼다.


"다른 건 몰라도, 내가 경주에 대해서는 얘기할 수 있지. 경주를 이해하기 위해 사람들은 능을 보고, 탑을 보고, 사찰과 유적을 보는데 사실 경주의 진짜 역사는 사람들이 매일 부르는 이름 속에 숨어 있거든."


그렇게 형산강 물길을 따라 경주의 지명들이 호명되기 시작했다. 이름해, 형산강이 만든 경주의 지명사. 단언컨대, 가장 재미있는 형산강 이야기가 시작되는 참이었다.


배수 잘 돼 항상 강이 메말라 '건천'

'사방' 등 형태 그대로 지명으로 남아

◆강의 언어로 태어난 이름들


"형산강을 따라 펼쳐진 경주의 평야와 골짜기들은 그 자체로 강의 역사책이라고 보면 돼. 강의 물이 넘치거나 마르는 모양새가 그대로 지명으로 남아있는 곳이 많아."


제일 대표적인 곳이 '안강(安康)'이다. 안강읍에 있는 '사들', 혹은 '사평(沙坪)'이라 부르는 평야는 홍수가 나면 이 마을에 모래가 많이 쌓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그 옆에 있는 '사방리(士防理)'는 형산강에서 범람하는 홍수를 막는다는 뜻에서 '사방(砂防)'이라 불리다가 이후 선비들이 많이 살았다고 해서 한자를 '선비 사(士)'자로 바꿨다.


반대로, '건천(乾川)'은 누구나 짐작하듯 강변의 배수가 잘돼 항상 강이 메말라 있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흥미로운 건 이런 지명들이 모인 곳이 '안강읍'이라는 것이다.


"경주시 홈페이지에 보면 신라 경덕왕 때 주민의 평안함을 염원하며 안강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나오는데, 아마도 당시 주민의 평안함은 강의 평안함에 달려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신라인들은 강을 중심으로 조금 더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했는지도 몰라. 지금까지의 지명이 강의 형태를 직접적으로 말해주는 이름이라면, 지금부터 이야기는 완전히 차원이 달라지거든. 그 강에 사는 신성한 생명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어."


아홉 마리의 황룡이 승천했다는 전설을 간직한 황룡사지. 이제는 황룡사구층탑을 받치던 심초석과 황룡사의 기단석 등만 남았지만, 황룡사지가 위치한 구황동(九黃洞)의 지명 속에는 땅과 하늘을 잇던 신성한 왕권의 역사가 새겨져 있다. 국가 사찰의 중심 기둥을 받치던 심초석과 기단석은 신라가 물길의 흐름을 읽어 도성의 축을 정하던 방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사진은 황룡사구층탑 심초석과 기단석.

아홉 마리의 황룡이 승천했다는 전설을 간직한 황룡사지. 이제는 황룡사구층탑을 받치던 심초석과 황룡사의 기단석 등만 남았지만, 황룡사지가 위치한 '구황동(九黃洞)'의 지명 속에는 땅과 하늘을 잇던 신성한 왕권의 역사가 새겨져 있다. 국가 사찰의 중심 기둥을 받치던 심초석과 기단석은 신라가 물길의 흐름을 읽어 도성의 축을 정하던 방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사진은 황룡사구층탑 심초석과 기단석.

'구황동' 이름에 남은 황룡 승천 전설

9층탑·금동 삼존불상 등 수많은 이야기

◆강에서 승천한 왕권의 좌표


아홉 마리의 황룡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남아있는 곳, 형산강의 수맥이 크게 꺾이는 지점에 황룡사지가 있다. 황룡사는 6세기에 만들어져 고려 때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졌지만, 그 이야기는 황룡사가 세워졌던 '구황동(九黃洞)'에 지금도 여전히 이름으로 남았다.


"용이 한두 마리도 아니고, 왜 하필 아홉 마리였을까?"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에도 경주 사는 화가는 그새 삼국유사의 원문을 부리나케 검색한 모양이다.


"자장율사가 왕에게 말하기를 동쪽 나라의 중앙에 9층탑을 세우면 아홉 나라가 스스로 신하가 될 것이라고 했대. 불교에서는 기본적으로 존재의 세계를 9계(九界) 또는 10계(十界)로 설명하는데, 아마도 아홉 나라는 신라 주변의 외적이나 오랑캐를 상징적으로 지칭하는 불교식 개념이었던 것 같아."


실제로 동아시아에서 9는 가장 큰 숫자로, 제왕의 수이자 하늘과 인간 세계를 잇는 수로 통한다. 그래서 신라인들은 아홉 마리의 황룡이 승천한 형산강 수맥의 중심에 '9층'의 탑을 세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1장6척(약 4~5m)에 달하는 금동 삼존불상을 모셨다. 왕으로 상징되는 용, 물에서 솟구쳐 하늘에 닿는 존재, 부처의 얼굴을 한 신성한 권력… 수많은 상징들이 결집된 곳이 바로 이곳 구황동이다.


"경주 왕경의 중심에 구황동이 있고, 용강동, 황룡동… 형산강 물길을 따라 수많은 용(龍)들이 지도에 등장해. 그리고 그 물길이 동쪽으로 이어져 동해로 빠져나가는 곳에서 마지막으로 또 한번 용이 등장하는데, 바로 문무대왕면의 용당리야."


죽어서는 바다의 용이 돼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대왕의 수중릉. 문무왕의 유언이 남은 용당리(龍堂里)의 이야기는 형산강이 가진 물의 신성이 바다의 세계관과 합쳐져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죽어서는 바다의 용이 돼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대왕의 수중릉. 문무왕의 유언이 남은 용당리(龍堂里)의 이야기는 형산강이 가진 물의 신성이 바다의 세계관과 합쳐져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죽어서는 바다의 용이 돼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유언이 남은 곳. 문무왕은 삼국을 통일한 후 부처의 힘을 빌어 왜구의 침입을 막고자 용당리에 절을 세웠다. 절이 다 지어지기 전에 왕이 죽자 아들 신문왕은 동해 입구의 큰 바위 위에서 장례를 치르고 그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감은사(感恩寺) 지하에 용이 출입할 수 있는 수로를 만들었다. 여기에서 이어진 깊은 못을 사람들이 '용담(龍潭)'이라 부르다가 '용당리(龍堂里)'로 굳어졌다.


신라의 물길은 불교와 밀접하게 이어져 있다. 나라를 지키던 호국사찰 아래, 용이 드나들던 곳. 그런 곳이 경주에는 또 있다.


삭발 후 불가 귀의 과정 '모화' '입실' 등

토함산과 남산자락 지명에 고스란히

◆물가에서 시작된 불교 수행의 지형학


"불국동의 원래 지명이 용동(龍洞)이었다는 거 알아? 토함산 자락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강해서 옛날엔 이곳을 용이 드나드는 골짜기라고 믿었대."


왕과 신성을 동시에 상징하는 '용'의 골짜기. 불국정토로 향하던 신라인들은 그 길 위의 여정과 기억을 고스란히 지명으로 남겼다.


"경주의 최남단, 지금의 외동읍이 신라시대에는 모화군(毛火郡)이었어. 신라시대 불가에 귀의하는 사람들은 여기 모화군 성문에 이르러 삭발을 하고 머리털을 불태운 뒤 불국사로 들어갔다고 해. 그래서 이곳 지명이 머리카락 '모(毛)'와 불 '화(火)'자를 쓰는 모화리가 됐다는 이야기."


왕을 대신해 신성의 얼굴을 맡았던 황룡사 장육존상 불두 조형물의 모습. 장육존상은 신라삼보의 하나로 황룡사에 모셔졌던 거대한 금동 삼존불상이다. 1장 6척(약 4~5m) 규모이며 574년에 조성된 것으로 전해지는데 왕권의 신성성과 신라 불교의 위세를 상징한다.

왕을 대신해 신성의 얼굴을 맡았던 황룡사 장육존상 불두 조형물의 모습. 장육존상은 신라삼보의 하나로 황룡사에 모셔졌던 거대한 금동 삼존불상이다. 1장 6척(약 4~5m) 규모이며 574년에 조성된 것으로 전해지는데 왕권의 신성성과 신라 불교의 위세를 상징한다.

모화리에서 불국사에 좀더 가까이 가면 '입실(入室)리'가 있다. 경주시청 홈페이지에 따르면, 신라시대 이곳에는 작은 절이 무려 78개나 있어 마을 전체가 마치 절과 절 사이의 복도 같았다고 한다. 불국사에 들어가는 사람은 미리 이곳의 작은 절에 들어와 마음을 가다듬었는데 불도(佛道)를 닦으러 오는 사람들이 실내로 들어오는 문이라 해 '입실'이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삭발을 하고, 머리카락을 태우고, 작은 절을 거치며 마음을 다잡던 길, 그 수행의 과정이 고스란히 토함산과 남산 자락의 지명으로 남은 도시라니! 이름의 기원을 알고 나니, 경주가 새삼 새롭게 보였다.


"삼릉이 위치한 '배리(拜里)'도 마찬가지야. 나도 처음에는 과일 배를 말하는 줄 알았는데, 불교에서 말하는 108배, 삼보일배할 때의 그 배를 쓰는 '배리'야. 그 옛날 이곳 큰 벼슬아치 집에서 제를 올리는데 그 집의 풍속은 스님이 술잔을 먼저 올려야 했대. 이리저리 재고 따지며 스님을 물색하다가 나중에는 시간에 쫓겨서 하인들이 길 가던 한 중을 부랴부랴 모시고 왔나봐. 주인이 보니 그 중의 행색이 말이 아니었대. 그래서 불쾌해 하며 도로 돌려보냈는데, 순식간에 그 중이 눈앞에서 사라졌다는 거야. 예사 중이 아니었던 거지. 뒤늦게 주인이 큰 깨달음을 얻고, 스님이 계신 절을 찾아가 온 식솔들이 다 함께 절을 하며 사죄했다 해서 '배리'라고 부른대."


경주 형산강역사문화관광공원에 세워진 유금이 조형물. 형산강은 평범한 소녀의 이름을 지명에 남겼다. 큰 권력도 큰 신앙도 아닌 강가에서 울던 한 소녀의 이름이 마을 전체의 이름이 됐다. 경주는 거대한 왕권의 역사에서부터 소소한 개인의 감정까지 집단 기억으로 남은 도시다.

경주 형산강역사문화관광공원에 세워진 '유금이' 조형물. 형산강은 평범한 소녀의 이름을 지명에 남겼다. 큰 권력도 큰 신앙도 아닌 강가에서 울던 한 소녀의 이름이 마을 전체의 이름이 됐다. 경주는 거대한 왕권의 역사에서부터 소소한 개인의 감정까지 집단 기억으로 남은 도시다.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형산강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불교의 교리로, 뒤늦은 후회와 깨달음으로, 그리고 아주 작고 일상적인 삶의 이야기들로 이어졌다.


열세 번 과거시험에 낙방한 선비가 적어둔 두 글자, '時來(때가 온다)'에서 유래한 '시래동(時來洞)', 병든 부모를 살리기 위해 아이를 땅에 묻기로 결심한 부부가 아이의 무덤자리가 될 땅 속에서 종을 발견했다 해서 '종동(鐘洞)', 강가에서 울던 소녀 '유금'의 이름을 딴 '유금리'… 거창한 왕의 역사뿐 아니라 물가에 살던 사람들의 평범한 삶과 눈물도 이곳 경주에선 지명이 됐다.


지명은 결국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집단 기억이다. 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강 곁에는 지금도 이름의 역사가 흐른다. 경주를 읽는 새로운 방식이 여기에 있다.


글=이은임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기획 - 경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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