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숙도에 자리한 부산현대미술관. 2018년에 개관했으며 외벽은 패트릭 블랑의 작품 '수직정원'으로 뒤덮여 있다.
부산현대미술관 측면의 수직정원. 175종의 토종, 토착 식물 4만 4천여 포트가 식재되어 있는 겨울 정원에 까치와 까마귀가 날아든다.
부산현대미술관 측면의 수직정원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가에서 미술관의 입구를 마주했을 때,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섬 안의 미술관은 섬을 가로지르는 하굿둑 도로인 낙동남로 변에 딱 붙어 있었다. 을숙도 아름다운 갈대밭 속에 새둥지처럼 놓여 있을 것 같았다. 아니, 바랬다. 상상하고 떠올려봤다. 그것은 순진하고, 모자란 생각이었다.
◆ 을숙도의 부산현대미술관
까마귀 한 마리가 미술관 외벽에 내려앉고, 옥상에서 까치가 흰 가슴을 쭉 내민다. 미술관 외벽은 정원이다. 수직의 정원이고, 이 계절엔 겨울 정원이다. 겨울 갈대밭처럼 다양한 명도와 채도의 정원 속에 몇 송이 마른 꽃들이 서걱대고 흙빛으로 시든 풀들이 의자에서 잠든 여자의 손처럼 아래로 늘어져 있다. 까마귀가 파드득 날아오른다. 가느다란 나뭇가지가 휘청하더니 재빨리 마지막 탄력을 보여준다. 까악 울음소리가 멀어지자 까치는 까마귀의 나뭇가지로 휘 날아들었다. 여기에 무엇이 있지? 궁금했다는 듯.
부산현대미술관 외벽을 덮고 있는 것은 패트릭 블랑의 작품 '수직정원'이다. '수직정원'은 흙 없이도 공기 중의 수분과 기체화된 영양분을 바탕으로 살아갈 수 있는 식물들을 건물의 벽 같은 수직의 면에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든 정원이다. 패트릭 블랑은 프랑스 식물학자로 '수직정원'의 창시자이며 '수직정원'을 예술의 한 분야로 정착시킨 인물이다. 단순히 식물을 벽에 설치하는 작업이 아니다. 그는 전문적 지식을 바탕으로 식물의 생태와 본능을 연구해 상호자생이 가능한 식물들을 연결하고 햇볕과 비, 바람, 계절의 온도 차를 모두 감안해 식물들을 배치한다. 부산현대미술관 작업을 위해 그는 한국에 여러 번 방문하여 낙동강 하구의 을숙도에 자리한 미술관의 생태적 환경을 연구했다고 한다. 부산현대미술관의 수직정원에는 직접 조사하고 연구하여 구성한 175종의 토종, 토착 식물 4만 4천여 포트가 식재되어 있다. 지역의 조경학도들과 함께 완성한 그의 작품은 여러 종류의 식생이 어우러져 있어 변화무쌍한 실루엣과 풍부한 질감이 특징이다.
커다란 구조물이 통째로 포장된 장면은 이제 충격적이지 않다. 가장 쉽게 떠오르는 것은 '미디어파사드'이고, 가장 따뜻하게 떠오르는 것은 담쟁이덩굴이다. 건축물 자체를 선물 혹은 상징적인 오브제로 연출한 하이엔드 브랜드들의 건물도 떠오른다. '수직정원'은 이 모두와 같으면서 다르다. 매 계절, 매일의 날씨마다 다른 시각적 스크린이고, 천연기념물인 을숙도 가운데에 자리 잡은 인공물을 자연과 연결시키는 구성된 자연이다. 구성되었기에 매번 볼 수 있고, 자연이기에 그 누구도 이 작품을 온전히 다 봤다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주차장 뒤로 을숙도 문화센터 건물이 높다. 문득 미술관, 문화센터, 공연장, 체육공원, 문화관, 선착장 등 공공을 위한 일단의 인공물들이 모두 을숙도 북단에 모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이트와 배치를 이해하게 된다. 을숙도의 부산현대미술관은 도시공간이자 자연환경이고 이상이자 현실이다.
'나의 집은 나' 전시의 '인피니트 루프'. 관계의 그물망과 삶의 흔적, 사람들의 기억을 형상화한 공간으로 도시와 자연,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흐린다.
'영화 이후' 전시. 전시실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라는 장-뤽 고다르의 기념비적 비디오 작업인 '영화사(들)'을 보게 된다.
어린이 도서관인 '책그림섬'. 을숙도 갈대숲을 모티브로 조성된 곳으로 예술성이 뛰어난 팝업 북, 어린이를 위한 독립 출판물, 다양한 언어의 그림책 등을 소장하고 있다.
◆ 자연, 뉴미디어, 인간 중심
부산현대미술관은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2018년 문을 열었다. 주요 의제는 '자연', '뉴미디어', '인간'으로 동시대미술과 다양한 형식의 예술 작품에 열려있다. 특히 디지털 기술 기반의 영상과 뉴미디어 작품에 주목하는데 미술관 전체 소장품 중 영상과 뉴미디어 요소가 포함된 작품이 75% 이상을 차지한다. 특히 2000년 이후 제작된 작품이 90% 이상을 차지하는 점은 동시대성을 표방하려는 미술관 컬렉션의 방향성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전시실은 총 5개다. 지하에 제1·2·3전시실, 1층에 제4전시실, 2층에 제5전시실이 있다. 1층과 2층은 연결되어 있어 높이가 약 12m인 웅장한 규모다. 초대형 작품이나 각종 설치미술을 전시하는데 유리하고 2층에서 1층을 내려다볼 수 있다. 현재는 '나의 집이 나'라는 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작가, 건축가, 연구자 등 10팀이 참가했으며 인구감소, 지역소멸, 1인 가구, 고령화, 돌봄의 재편 등 오늘의 도시 현실 속에서 지속가능한 삶의 규모를 탐색하는 '축소 지향적 공간'을 제안한다. 단순한 전시 설치물이 아니라 관람자가 직접 걷고, 통과하고, 접고, 확장하고, 상호작용할 수 있는 공간 작품들로 축소도시의 삶을 체험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모두 팔십에 서로의 요양보호사가 되어있지 않을까?'라는 작품 앞에서 마음이 쿵 하더라. 전시는 내년 3월 22일까지다.
지하 제2·3 전시실에서는 현재 '영화 이후'라는 주제의 전시가 진행되고 있는데, 영화가 현대미술 속에서 어떻게 새로운 형태로 진화하는지를 보여준다. 영화와 다큐멘터리, 16㎜ 필름 설치, 실험영화, 디지털 애니메이션, 무빙 이미지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 111점을 볼 수 있고, 장-뤽 고다르의 기념비적 비디오 작업인 '영화사(들)', 마이클 스노우의 '씨 유 레이터', 하룬 파로키의 '그리피스 영화의 구조' 등이 포함되어 있어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가슴 뛰는 전시다. 전시실 안의 '극장을숙'에서 다양한 영화도 접할 수 있다. 전시는 내년 2월 18일까지다.
지하 제1전시실은 '소장품섬'이라는 이름을 따로 가지고 있다. 부산현대미술관이 소장한 작품 한 점을 깊이 있게 소개하는 공간이다. 현재는 문소현 작가의 '공원 생활'이라는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지하 전시장 맞은편은 유난히 환하다. 그곳에는 유아들을 위한 독서 공간과 어린이 도서관인 '책그림섬'이 자리한다. 을숙도 갈대숲을 모티브로 조성된 '책그림섬'은 예술성이 뛰어난 팝업 북, 어린이를 위한 독립 출판물, 다양한 언어의 그림책 등을 소장하고 있다. 보호자를 동반한 어린이만 예약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
부산현대미술관 야외조각공원. '나의 집은 나' 전시의 '콘크리트 유토피아'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건설 잔재를 재활용한 작품이다. 을숙도문화센터가 가깝다.
몇 사람 없던 미술관이 정오를 훌쩍 넘기자 북적북적하다. 야외 정원을 잠시 거닌다. 이제야 뒤편에 펼쳐진 을숙도의 자연이 보인다. 겨울만 되면 을숙도가 생각나는 걸 보면 절절하지만 간헐적인 짝사랑인 모양이다. 미술관 옥상에서 공사 중이라 야외정원 주변이 조금 어수선하다. 식당을 짓고 있단다. 옥상 정원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홈페이지 층별 안내도에는 나와 있지 않다. 식당이 들어서면 높고 따뜻한 곳에서 을숙도를 내려다볼 수 있게 될듯하다. 부산현대미술관의 주요 의제는 자연, 인간, 뉴미디어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모든 전시 주제가 의제에 부합된다. 미술관의 정체성은 결국 콘텐츠에서 좌우된다. 눈이 나리면 수직정원은 어떤 모습일까. 눈이 내리면 을숙도는 어떤 모습일까. 또 봄이 오면.
글·사진=류혜숙 전문기자 archigoom@yeongnam.com
부산현대미술관 동편에 갈대밭이 펼쳐져 있다. 도로 위 다리는 남쪽의 을숙도철새공원과 연결되는 사람과 동물의 통로다.
>>여행정보
55번 대구부산고속도로 부산 방향으로 간다. 대동 톨게이트에서 요금을 지불하고 약 7㎞ 정도 더 직진하면 중앙고속도로 종점인 삼락IC다. 종점 표지가 나타나면 오른쪽 하굿둑 방향으로 나가 강변대로를 타고 직진한다. 하굿둑 교차로에서 우회전해 가면 을숙도문화관 지나 도로변에 미술관이 자리한다. 미술관은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개관하며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다. 월요일과 1월1일은 휴관한다. 관람요금은 무료다. 단, 일부 기획전이나 특별전은 유료로 운영될 수 있다. 주차요금은 10분당 100원(1일 2천400원)이며 대형, 소형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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