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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피란민촌의 흔적, 그때 그 사람들] <4> 주소마저 비극이었나…대구 동구 신암동 ‘625번지’의 사투

2025-12-30 16:13

동구 신암동 일대 일명 ‘6·25촌’에 살았던 이한구씨
“비 오면 온 동네가 진흙뻘 변해…지독했던 가난”

8살 나이에 온가족이 서울에서 대구로 피란을 와 신암동 6 ·25촌에 정착한 이한구(79)씨는 여전히 신암동을 삶의 터전 삼아 택시 운전을 하고 있다. 최시웅기자

8살 나이에 온가족이 서울에서 대구로 피란을 와 신암동 '6 ·25촌'에 정착한 이한구(79)씨는 여전히 신암동을 삶의 터전 삼아 택시 운전을 하고 있다. 최시웅기자

1950년 6·25 전쟁의 포화 속에서 대구로 몰려든 피란민들은 삶의 벼랑 끝에서 터전을 닦았다. 대구역과 칠성시장 인근, 이른바 '푸른 다리' 밑 움막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던 피란민들 중 일부는 1950년대 중반 내려진 이주 명령에 따라 동구 신암동 625번지 일대, 일명 '6·25촌'으로 둥지를 옮겼다.


당시 신암동 터는 과거 군부대와 차량 시험장이 있던 거친 땅이었다. 정부는 피란민들에게 1가구당 약 66㎡(20평) 남짓한 땅을 배정했다. 하지만 말 그대로 땅만 있었다. 집은 피란민들이 각자 알아서 지어야 했다.


8살때 온가족이 서울에서 대구로 피란을 와 신암동 6·25촌에 정착했던 이한구(79)씨도 힘겨운 유년기를 보냈다. 그는 "그때는 지금처럼 벽돌도 없었다. 산에서 흙을 파다 흙벽돌을 구워 오두막처럼 집을 지었다. 행여 집이 무너질까 노심초사하며 보낸 세월이 한두 해가 아니다"라고 회상했다.


6·25촌의 삶은 빈곤과의 처절한 사투였다. 아홉 식구가 조그만 방 한 칸에 몸을 맞대고 살았다. 겨울엔 손가락이 얼어 터지는 동상이 일상이었다. 끼니를 잇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웠단다. 이씨는 "비가 오면 온 동네가 진흙뻘로 변해, 장화가 없으면 다닐 수가 없었다. 화장실은 공용으로 썼고, 연탄도 없어서 먼 산에 가서 나무를 캐 온 기억이 난다"며 "도시락 하나 싸들고 나가 배운 정비기술로 평생을 먹고 살았다.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기가 참 힘겨웠다"고 했다.


그는 "옛 대구선 철길에 가면 미군들이 먹을 것들을 던져주곤 했다. 그걸 얻으러 자주 갔었다. 여름이면 지금은 사라진 못에서 놀았다. 살아온 과정을 다 이야기하려면 끝도 없다. 하지만 그 고생을 견뎠기에 지금의 대구가 있는 것 아니겠냐"고 했다.


대구 동구 신암동에 있는 피란민촌 공동 우물 흔적. 영남일보DB

대구 동구 신암동에 있는 피란민촌 공동 우물 흔적. 영남일보DB

대구 동구 신암동의 옛 피란민촌 공동 우물은 현재 주민 산책로로 꾸며졌다. 최시웅기자

대구 동구 신암동의 옛 피란민촌 공동 우물은 현재 주민 산책로로 꾸며졌다. 최시웅기자

현재 6·25촌의 옛 모습은 많이 소실된 상태다. 과거 흙벽으로 지어졌던 초기 주택들은 대부분 자취를 감췄다. 기상대 기념공원 인근 좁은 골목길에 녹슨 채 방치됐던 공동우물은 산책로로 바뀌었다. 피란민들의 삶의 애환이 서린 곳이었다.


이씨는 "물통을 지고 한참을 걸어 우물에서 힘겹게 물을 길러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며 "신암동 6·25촌은 대구 피란민의 역사다. 흔적은 사라져도 그때의 생존 의지와 공동체 정신은 잊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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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시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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