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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순의 문명산책] 이스파한의 정원

2026-02-06 06:00
김중순 계명대 명예교수

김중순 계명대 명예교수

이스파한은 15~17세기 사파비 왕조 시절 '세상의 절반'이라 불릴 만큼 찬란한 도시였다. 정치와 종교, 예술과 상업이 교차하던 이곳은 하나의 거대한 정원 도시였다. 도시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물길이 십자 형태로 흐르며 공간을 넷으로 나누는 구조다. 이는 우주가 질서와 균형 속에서 유지된다는 고대 페르시아의 세계관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정원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과 맺는 관계의 윤리적 선언이었다.


낙원 혹은 파라다이스라는 말은 '울타리로 둘러싸인 정원'이라는 뜻의 고대 페르시아어 파리데이자(pairidaeza)에서 유래하였다. 따라서 그들에게 낙원이란 곧 정원이다. 저절로 주어진 자연이 아니라, 인간의 책임과 돌봄 속에서 유지되는 공간이었다. 척박한 이란 고원에서 정원이 가능했던 것은 사막 아래를 흐르는 지하 수로 카나트 덕분이었다. 바빌론의 '공중정원' 역시 낙원의 메소포타미아적 변주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을 폭력적으로 착취하지 않고, 그 한계를 이해하고 그 리듬에 자신을 맞춘 문명의 지혜였다. 이스파한의 정원은 풍요를 과시하지 않는다. 물은 늘 흐르지만 언제나 귀하고, 나무는 자라지만 과잉을 경쟁하지 않는다. 그 아름다움은 넘침이 아니라 절제에서 비롯된다.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가꾸어야 하는 대상이 된다. 자연을 소유하는 대신, 자연과 책임 있는 관계를 맺는 공간, 그것이 페르시아의 낙원이었다.


에덴동산은 다르다. 우리가 결코 들어갈 수 없는,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상실된 원형이다. 인간은 타락하여 에덴에서 추방되었다. 에덴은 과거로 밀려났고, 동시에 미래로 유예되었다. 오직 신의 은총 안에서만 다시 들어갈 수 있는 약속의 장소가 되었다. 그것은 단테의 '신곡'에 이르러 빛과 수학적 질서로 구성된 완성된 세계가 된다. 가꾸어야 할 공간이 아니라, 복종하고 관조해야 할 질서가 되었다. AI를 비롯한 과학기술 역시 이 약속된 낙원을 현실로 회복할 수 있다는 신념을 만들어냈다. 자연은 분석 가능해졌고, 질병과 결핍은 기술로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 자연은 함께 살아야 할 존재가 아니라 최적화해야 할 대상이다. 인간을 자연의 리듬에서 분리시켰다. 편리함을 위해서다. 그러나 과학기술이 약속하는 오류 없는 세계 역시 절제된 이스파한의 낙원과는 다르다. 그곳에는 물소리도, 계절의 불균형도, 노동도, 경쟁도, 갈등도 없다. 이미 완성된 세계이기에 더 이상 '정원사로서의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스파한에는 아직 낙원이 남아 있을까? 신의 이름으로 '완결된 질서'를 선포하는 체제 아래에서 질문은 불순이 되고, 선택은 위협이 된다. 이미 '아름다움'이 결정된 사회에서는 더 나은 낙원을 향한 상상 자체가 금지된다. 낙원을 정원으로 재현했던 문명이 이제는 낙원을 찾는 행위 자체를 위험한 일로 여기고 있다. 완성된 낙원은 언제나 폭력을 동반한다. 더 이상 가꿀 필요가 없는 세계에서는, 살아있는 인간의 목소리마저 훼방의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이스파한에서는 신정 체제의 비극적 학살에 대한 저항이 계속되고 있다. 그들이 흘린 피와 희생은 새로운 낙원을 꿈꾸는 씨앗이다. 낙원은 이미 주어진 공간이 아니라, 폭력과 불의에 맞서 가꾸어야 할 미래의 형식이라면, 그들의 낙원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고통의 순간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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