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을 해도 처벌받지 않는 사회…잊을만하면 대형참사 되풀이
세월호 참사 1주기를 하루 앞둔 15일 전남 진도 조도면 해역에서 한 세월호 희생자 가족이 세월호가 침몰한 지점을 바라보며 오열하고 있다. 연합뉴스 |
세월호 이후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라 전체를 채웠지만, 한 달 뒤 고양종합터미널에서 불이 나 9명이 숨졌고 같은 달 전남 장성 한 요양병원에서는 22명이 화마에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같은해 10월 판교에서는 환풍구가 무너져 내려 16명이, 12월 오룡호 침몰로 53명이 숨지거나 실종됐다. 무감각 사회의 시작은 비단 세월호참사가 아닐지도 모른다. 세월호 이전 경주 마우나오션리조트 붕괴로 10명, 2003년 대구지하철 화재참사로 192명, 95년 대구지하철 상인역 가스폭발로 101명, 삼풍백화점 붕괴로 502명이 숨졌다.
이처럼 한국은 한 마디로 ‘사고사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 참사는 되풀이되는가. 여기에 대한 근원적 분석 없이는 전 국민을 몸살 앓게 한 세월호 사고가 남긴 아픔을 우리는 제대로 극복할 수 없다.
위험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안전의식 둔감해져 ‘악순환’
“나에게도 생길 수 있는 일”
시민으로서 책임감 가져야
◆왜 대형사고에 무감각한가
일찍이 1980년대에 ‘위험사회론’을 주창했던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한국을 ‘아주 특별하게 위험한 사회’라고 지적했다. 위험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시민사회는 위험에 무감각해지고, 시민적 통제의 가능성도 점점 낮아진다. 위험이 더 이상 우발적이거나 비정상적인 것이 아니라 위험 자체가 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불안 폭증의 시대, 위험 일상화의 시대로 진입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한국사회가 이렇게 고도의 위험사회가 된 이유로 ‘압축근대화’를 꼽는다. 정해진 목표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장주의가 최고 가치로 여겨지면서 절차와 과정의 정당성이 무시됐고 안전보다 모험, 내실보다 외형, 심사숙고보다 임기응변이 생존에 더 유리한 사회로 변질된 것이다.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또 다른 요인은 어떤 잘못을 해도 반성하지 않고 처벌되지 않는 사회환경이다. 당장 세월호 사건 자체도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책임을 묻지 못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도망친 선장과 선원이 중형을 선고받고, 검찰은 기다렸다는 듯 유병언 일가의 비리를 파헤쳐 희생양으로 내세웠을 뿐이다.
윤석기 2·18 희생자대책위원장은 “잊을 만하면 되풀이되는 대형참사 소식은 어느새 이것이 당연한 일인 양 행세하며 우리 곁에 자리 잡는다. 이러한 이력과 인이 박힘을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윤 위원장은 “대형참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 는 대범함을 부끄럽게 여기고 한명의 목숨과 건강이라도 위협받는 상황에 크게 놀라고 경계하는 예민함을 당연하게 여기고 가르치고 배우는 지속적인 훈련이 필요하다”고 했다.
노진철 경북대 교수는 사회에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는 주요 사고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는 태도는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책임을 벗어나려는 태도’에서 비롯된다고 분석했다.
자신의 삶을 위협할 수 있는 사건 사고가 범람하는데도 무관심한 것은 정치적 결정이 자신은 알지도 못하고 통제할 수도 없는 고위 관료에 의해 내려진다는 무력감과 소외 의식에서 비롯된 정치적 체념의 발로다. 시민의 정치적 무관심은 집권자가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을 규명하고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하려는 노력보다 일방적 대증요법적인 안전대책 제시와 책임회피로 사건을 마무리하려는 유혹을 수수방관할 수 있다. 결국 시민의 무관심이 사고 때마다 정부가 반복해서 안전대책을 발표하는데도 사건사고는 줄어들지 않는 악순환을 만들어낸다.
노 교수는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었듯이 나도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피해자와의 공감은 시민의 호혜성 의식 형성에 기초를 이룬다. 시민적 무관심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선거 투표뿐만 아니라 시민단체의 활동에도 참여하는 등 주권자로서의 정치 참여 경험을 쌓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김연희 대구대 교수는 “빈번하게 발생하는 사고는 대중의 안전의식을 둔감화시킨다. 또 사건 직후 다양한 해법이 논의되지만 결국은 큰 변화 없이 일상으로 회귀하는 것을 본 사람들은 무기력감으로 문제해결을 위한 노력을 하기보다는 비극적 사건이 주는 고통을 잊는 대처 방식을 취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웬만한 사고가 일어나도 자기가 직접 관계되지 않으면(자기 자신이나 자기 친척이나 지인이 피해자가 아니면) 크게 놀라지 않는다. 이런 무감각이 문제가 되는 것은 시민으로서의 개개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세월호 이후 단원고에서 5주간 심리지원 전문가로 일했던 정운선 칠곡경북대학교병원 학생정신건강지원센터장은 이렇게 말한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뉴스는 ‘너는 위험에 처했다. 너는 안전하지 않다. 너희 아이들의 안전은 국가나 학교가 책임져 주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아주 분명하게 전달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는 불안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우리의 뇌는 점점 더 흥미 위주나 위기를 자세히 묘사한 기사에 노출되어서 둔감해지고 더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뽑지 않으면 그 기사의 조회수는 올라가지 않는다. 뇌는 점점 더 ‘Traumatize’(외상에 영향을 받아가게) 되는 것이다. 재난 상황에서는 자극적인 흥미 위주의 보도를 지양하고 아이들과 온 국민의 뇌를 외상화시키지 않도록 해야 한다.”
◆무뎌진 감각을 되살릴 방법은 없나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는 중층적이고 복합적이지만, 해법은 비교적 명확하다. “일상 속에서 도사리고 있는 사고 발생 가능성에 대한 인지와 무감각 사회를 개선하기 위한 국민적 연대가 중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 개개인이 아니라 국민적 연대를 통해 세월호 참사 등의 원인이 되는 일상적 모순을 개선하기 위해 힘을 모으고 이를 통해 삶의 정치, 서로 함께 이야기하며 어울려 사는 공동체 활성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 대형 사고가 남이 아니라 나에게 닥칠 수 있다는 구조적 체계를 사회구성원들이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런 인식을 할 수 있도록 교육하고 알리는 것도 중요하다.
다른 한 편으로는 민주주의를 심화시켜야 한다. 위험사회를 극복해나가는 대안은 일반 시민들의 참여를 통해 국가를 시민들의 통제하에 놓는 ‘성찰적 근대화’다. 위임한 권한이 대다수 국민의 뜻과 다르게 행사되고, 그들이 그런 배신을 고칠 수 없다고 느낄 때, 요컨대 권한의 행사나 법 집행이 국민의 뜻과 동떨어지거나 자의적인 곳에서 무력감은 팽배해진다.
남재일 경북대 교수는 “개인 스스로가 리본을 달고 하는 의례를 넘어 자기 삶의 영역에서 세월호적인 것, 세월호 참사를 낳게 한 국내 일상적 모순을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것, 국민이 이를 네트워크형으로 확산하는 삶의 정치를 실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석수 경북대 교수도 “타자에 대해 책임을 느끼는 윤리, 서로 함께 이야기하며 어울려 사는 공동체 활성화에 참여하는 정치는 사유가 현실 속에서 판단을 통해 공통감과 만날 때 가능하다”며 “생활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는 기억을 절단하고 사유를 감금하는 다양한 기만자에 대해서 부단히 경계하고 저항하는 생활 정치의 길을 열어놓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은경기자 lek@yeongnam.com
노인호기자 sun@yeongnam.com
세월호 이후 1년 새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참사
사진① |
◆ 2014년 5월26일 경기도 고양종합터미널 화재(9명 사망, 60명 부상)
◆ 5월28일 전남 장성 요양병원 화재(21명 사망, 8명 부상·사진①)
◆ 6월29일 서울 강동구 소재 현대백화점 천호점 1층 지붕 붕괴
(6명 부상), 19년 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일과 동일
◆ 6월30일 서울 청량리역서 정차 중이던 전동차 화재
◆ 7월17일 부산 지하철 1호선 객실 화재(4명 부상)
◆ 7월22일 강원도 태백서 강릉발 무궁화열차와 관광열차 충돌
(1명 사망, 92명 부상)
◆ 8월3일 경북 청도서 늘어난 계곡물에 승용차 휩쓸려
사진② |
(일가족 7명 전원 사망·사진②)
◆ 8월25일 경남 창원서 시내버스가 하천에 휩쓸려(7명 사망)
◆ 10월17일 경기도 판교테크노밸리 야외광장 환풍구 철제 덮개
붕괴로 시민 추락(16명 사망, 11명 부상)
◆ 11월15일 충북 담양군 대덕면 펜션 바비큐장 화재
(5명 사망, 12명 부상)
◆ 2015년 1월10일 의정부시내 주거용 오피스텔 등 건물 3동 화재
(4명 사망, 124명 부상)
◆ 2월11일 인천 영종대교 106중 추돌사고(2명 사망, 60명 부상)
‘세월호 이후 1년 기획취재’ 외부전문가 그룹
▲김경민 대구YMCA 사무총장 ▲김석수 경북대 철학과 교수 ▲김연희 대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김태일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김희철 계명대 동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남재일 경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노진철 경북대 사회학과 교수 ▲백승대 영남대 사회학과 교수 ▲윤석기 2·18희생자대책위원장 ▲정운선 경북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나다 순)
이은경 기자
노인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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