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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九曲기행 .3] 주자의 무이구곡가...산수 풍광 읊었나, 도학사상 담았나…무이구곡가 해석 분분

2017-09-07
20170907
주자가 1183년에 지어 7년간 은거한 무이정사. 주자는 이곳에 은거하며 이듬해 무이구곡을 설정하고 무이구곡가를 지었다. 무이정사는 무이구곡 중 5곡의 명칭이고, 뒤로 보이는 암산이 은병봉이다.
20170907
무이정사 앞에 세워져 있는 주자 동상. 근래에 복원한 것이다.

조선에 찬란한 구곡문화를 낳게 한 무이도가(武夷櫂歌), 즉 무이구곡가는 어떤 내용일까. 주자가 1184년 무이산 계곡에 구곡을 정하고 지은 무이도가는 무이산의 개황을 읊은 서시로부터 시작된다. ‘무이산 위에는 신선의 정령이 어려 있고/ 산 아래 찬 물결은 굽이굽이 맑도다/ 그 가운데 기막힌 절경을 알고자 하는가/ 뱃노래(櫂歌) 두세 가락 한가로이 들어보게’. 무이산 천유봉에는 도교의 천유각(天游閣)이 있고, 천유각에는 800여세를 살았다는 신선 팽조와 두 아들 팽무·팽이를 모시고 있다. 신선의 정령이 어려 있다는 것은 이를 말한다.

무이산 개황 담은 序詩로 시작
일곡∼구곡 절경 노래 총 10수
성리학 탐구·토론 조선 선비들
朱子 뜻 이해 열쇠로 받아들여


◆무이구곡을 노래한 무이도가

‘일곡 시냇가에서 낚싯배에 오르니/ 만정봉 그림자 맑은 물에 잠겨 있네/ 무지개 다리 한번 끊어진 뒤 소식이 없고/ 골짜기와 바위 봉우리마다 푸르스름한 안개 자욱하네’

일곡 시다. 일곡 북쪽에는 대왕봉(527m)이 솟아있고 그 왼쪽에 만정봉(512m)이 있다. 만정봉은 도가(道家)의 무이군(武夷君)이 연회를 베풀던 곳이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진시황 2년 가을에 무이군이 허공에 무지개다리를 놓고 여러 신선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

‘이곡에 우뚝 솟은 옥녀봉아/ 꽃을 꽂고 물가에 서 있으니 누구를 위한 단장인가/ 도인은 더 이상 양대(陽臺)의 운우(雲雨)를 꿈꾸지 않으리/ 흥에 겨워 앞산에 들어가니 푸르름이 첩첩이네’

이곡에는 유명한 옥녀봉(玉女峯)이 있다. 무이산에서 가장 수려한 봉우리다. 정상에는 나무가 자라고 절벽은 마치 옥석을 잘라 조각한 모습이다. 옥황상제의 딸 옥녀가 아버지 몰래 구름을 타고 인간 세상에 내려왔다가 무이구곡의 산수에 매료되고 우연히 대왕(大王)과 만나 좋아하게 되어 돌아오지 않자, 옥황상제의 노여움으로 옥녀와 대왕이 돌로 변해 계곡의 양쪽에서 서로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삼곡에서 그대는 가학선을 보았는가/ 노 젓기 그친 지 몇 해인지 모르겠네/ 뽕밭이 바다로 바뀐 것이 언제인가/ 물거품 같고 바람 앞의 등불같이 가련한 인생이여’

삼곡에는 높고 험준한 암벽의 소장봉(小藏峯)이 있다. 소장봉에는 아득한 절벽 위 틈 사이에 배모양의 목제 관이 있다. 홍교판(虹橋板)과 가학선관(架壑船棺)이다. 가학선관은 골짜기에 설치한 배라는 뜻으로 배 모양의 관(棺)을 말하고, 홍교판은 무지개 다리판이니 관을 고정시키기 위한 목판이다. 풍장(風葬)을 하던 고대 남방의 소수민족 관인 가학선관은 수천년이 지난 지금도 썩지 않고 있다.

‘사곡의 동서에 우뚝 솟은 두 개의 바위산/ 바위 틈 꽃은 이슬 머금고 푸르게 드리웠네/ 금계(金鷄) 울어 새벽을 알려도 보이는 이 없고/ 공산엔 달빛 가득하고 와룡담엔 물결만 넘실대네’

사곡으로 돌아들면 거대한 바위산인 대장봉(407m)과 선조대(仙釣臺)가 마주하고 있다. 대장봉(大藏峯)은 도가(道家)의 대장경을 숨겨둔 곳이라고 한다. 대장봉 아래의 와룡담(臥龍潭)은 구곡 중에서 가장 깊은 곳이다. 선조대는 신선이 낚싯대를 드리우던 곳이라 한다. 강태공도 이곳에 와서 낚시를 했다고 한다. 대장봉에는 금닭이 있었다는 동굴 금계동(金鷄洞)이 있는데, 이곳에도 홍교판과 선관이 있다.

‘오곡은 산 높고 구름이 깊어/ 언제나 안개비에 평림(平林)은 어둑하네/ 숲 속의 나그네 알아보는 이 없고/ 사공의 노랫가락에 만고의 수심 깊어지네’

오곡은 주자가 무이정사를 세워 살던 곳이다. 무이구곡의 중심으로 계곡 북쪽에는 은병봉(隱屛峯)이 우뚝 솟아있고 그 아래에는 주자가 세운 무이정사가 있다. 이 시에 나오는 높은 산은 은병봉을 가리키고, 평림(平林)은 무이정사로 들어가는 초입의 지명을 말한다.

‘육곡의 바위 병풍 푸른 물굽이 휘감아 돌아가고/ 초가집 사립문은 온종일 닫혀 있네/ 나그네 와서 배를 띄워 바위 꽃이 떨어져도/ 원숭이와 새들 놀라지 않고 봄 정취 한가롭네’

구곡은 육곡에 이르러 북쪽에 우뚝 솟은 쇄포암을 바라보며 휘감아 돈다. 쇄포암은 수백개의 물줄기 자국이 파여 있어 장관을 이루는데, 마치 큰 천을 햇볕에 말리는 듯하다고 해서 그렇게 불린다. 신선의 손바닥 같다고 해서 선장암(仙掌巖)이라고도 한다.

‘칠곡이라 배를 저어 푸른 여울 거스르며/ 은병봉과 선장봉을 다시금 돌아본다/ 어여쁘다 어젯밤 봉우리에 비가 내려/ 폭포수에 더해지니 얼마나 차가울까’

칠곡에는 달공탄(獺控灘)이라는 여울이 있다. 달공탄에서 아래쪽으로 돌아보면 거대한 선장암과 은병봉이 보인다.

‘팔곡에 바람 불어 안개 개려 하고/ 고루암 아래에는 물결이 굽이쳐 돌아가네/ 이곳에 좋은 경치가 없다고 말하지 마라/ 여기부터 유람객들이 올라오지 않는구나’

팔곡을 돌아 구곡을 향하면 높이 솟은 고루암이 막아선다.

‘구곡에 다다르니 눈앞이 탁 트이고/ 비와 이슬 내리는 쌍마(桑麻) 밭 평천이 보이네/ 뱃사공은 다시 무릉도원 가는 길을 찾지만/ 이곳 말고 인간 세상에 별천지가 있으랴’

구곡을 지나면 평천(平川)이라는 곳이 나온다. 이곳은 지나온 구곡까지와는 달리 하천은 평평하게 흐르고, 주위에는 뽕나무, 대마 등이 자라는 들판이 있다.

◆조선 성리학자들의 무이도가 해석

조선의 구곡문화는 성리학자들이 주자의 이 무이도가(무이구곡가)를 접하면서 시작된다. 주자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구곡을 설정하고 무이도가를 읊었을지 모르나, 성리학이 우리나라에 수용된 이후 본격적으로 학문적 탐구와 토론의 대상이 된 16세기에 이르면 퇴계 이황과 같은 이들에 의해 무이도가는 주자의 문학과 사유를 이해하는 주요한 열쇠의 하나로 작용하게 된다. 그리고 중국인들과는 달리 무이도가를 특별한 뜻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정확한 이해인가를 따지는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났다.

구곡문화의 핵심인 무이도가 해석은 도학적으로 인식하여 입도차제(入道次第: 유교 도학의 경지로 진입하는 차례)를 읊은 재도시(載道詩) 또는 조도시(造道詩)라고 보는 관점(하서 김인후), 서정적으로 인식하여 인물기흥(因物起興: 일정한 사물을 통하여 시인이 흥취를 일으키는 것)을 읊은 서경시(敍景詩) 또는 서정시라고 보는 관점(고봉 기대승)으로 나뉘었다.

한편 퇴계 이황은 재도시로 해석하면서도 서경시로 해석하는 절충적 입장을 취했다. 퇴계는 주자가 ‘경치를 묘사하면서 그 속에 탁흥우의(托興寓意)했다’는 절충적인 결론을 내렸다. 산수의 흥취에 의탁하여 무언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담았다는 말이 ‘탁흥우의’이다.

이처럼 무이도가의 수용에서 드러나는 사림파 지식인들의 의식 차이는 조선 후기까지 지속되면서 구곡문화는 더욱 다양화하고 심화되게 되었다.

‘무이도가는 도에 들어가는 순서를 읊은 시’라는 인식은 조선 후기에 강하게 자리잡게 되었다. 이런 인식을 더욱 확산시킨 것은 ‘도가시주(櫂歌詩註)’였다. 지금 전하는 책이 아니어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여러 문헌에 부분적으로 전하는 내용을 보면 무이도가 10수를 입도차제에 맞게 정밀하게 해석하며 비평한 책으로 파악되고 있다.

조선 후기 많은 선비들은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무이도가를 인식하고 감상했다. 단순한 서정시가 아니라 조도시라는 도학적 입장에서 접근한 것이다.

무이도가 인식이 가장 단적으로 드러나는 곳은 구곡이다. 구곡을 도의 극처로 인식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무이도가 인식을 결정해 준다. 구곡은 경치가 빼어나지 않고 일상의 경관이 전개되는 공간이다. 이러한 평상의 공간을 극처로 인식하는 것은 유람적 접근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더욱 빼어난 경치를 찾아 나아가는 것이 당연한 자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학적으로 접근한다면 이곳이 바로 극처가 되는 것이다. 유자(儒者), 즉 선비의 도는 일상의 인륜에 있기 때문이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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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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