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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12] 이여성(下)…미술·복식·건축분야 평론가로서 발자취

2021-06-14
중년에 畵道로 전향한 동양화단의 귀재로 평가, 1936년부터 역사화로 화풍 변경
48년에 월북 사회주의 민족문화 활동, 대구 향토회 이끈 畵友 김용준에 의해 학계서 매장 당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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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성의 산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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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성은 독립운동가, 역사학자, 언론인, 정치인이었지만 일제강점기 상화 시인의 큰형 이상정과 함께 대구 근대화단을 개척한 화가이면서 미술사학자였다. 특히 미술·복식·건축 분야 평론가로서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대구 근대화단의 개척자

이여성이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쓴 글 '나는 무엇이 되려고 했나'에서 그가 '호렵도를 보고 말 탄 사냥꾼이나 잠수정을 탄 해군 사관이 되고 싶어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나아가 학창 시절 잠수정을 설계하는 등 그림을 그리다가 성적까지 나빠졌다는 이야기가 등장할 정도로 그림 그리기에 심취했다.

이여성이 최초로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한 때는 일본 유학 시절이던 1923년이다. 그해 대구 노동공제회관에서 열린 제2회 교남서화연구회전에 서양화 '정물'을 걸었다. 또 34년 조선서화협회가 주최한 제13회 협회전에 비회원으로서 동양화 '어가소동(漁家小童)'을 출품해 입선했다. 35년엔 이상범과 함께 2인전을 열었다. 당시 신문 기사에 '우리 산수화계의 독특한 경역을 이룬 청전 이상범씨와 우리 화단의 숨은 거재 청정 이여성씨'라고 소개됐다.

이 여성은 36년 7월4일부터 9일까지 조선일보에 '신미도행(身彌島行)'이란 글과 그림을 게재했다. 이 연작은 신미도, 기울포, 장군굴, 운종산, 유열만을 소재로 한 5폭 산수화다. 그는 곧 '화단의 혜성, 중년에 화도(畵道)로 전향한 동양화단의 귀재'로 평가받았고 조선화단의 중견화가로 인정받았다.

이여성은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 의거'에 연루돼 조사부장으로서 당시 부원이었던 청전 이상범, 사회부장이던 대구출신 소설가 빙허 현진건 등과 일제에 의해 강제사직 당한 후 본격적으로 동양화에 몰두했다. 그가 동양화에 빠지게 된 계기는 동양화단의 핵심인 이상범과의 인연이라고 본다. 이상범은 당대를 대표하는 화가였고, 이여성은 실경을 중시한 사경산수(寫景山水)를 즐겨 그렸다. 그러나 40년대 이상범은 최우석, 노수현, 김기창 등과 친일의 길을 걸었다. 이후 이여성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됐다. 이처럼 다른 지역과 달리 대구 화단을 개척한 선각자는 독립운동에 투신했다는 점이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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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성의 격구도.
◆사화가(史畵家)로서의 활동

이여성은 1936년부터 동양화에서 역사화로 화풍을 바꾸었다. 그는 "처음에는 소일 삼아 동양화를 장난한 것이 오늘은 이렇게 본격적으로 고대 풍속도를그리게 되었다"고 밝힌 바 있는데, 그의 역사화는 철저한 고증으로 인물과 생활상을 세밀하게 묘사했다. 그는 본격적인 자료수집과 함께 역사화 제작에 들어가 1936~37년에 10여점의 역사화를 그렸다. 김유신과 천관녀의 고사를 그린 '유신참마지도', 김정호를 드러낸 '대동여지도 작자 고산자', '청해진 대사 장보고', '격구지도' 풍속화 '가례동모이'와 기생 '황진이', 고대 무사를 그린 '고무도(古武圖)', '악조 박연 선생' , '농악그림', '마상재(馬上才)' 등이다. 모두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려는 의도를 가졌으나, 제2차대전 말기 역사화 수십 점이 분실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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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성의 동생 이쾌대가 그린 이여성의 초상화.
그의 '격구도'(1938, 수묵담채, 마사박물관 소장)는 현존 작 중 유일하게 남은 대표작으로 전통화풍에 서양 기법을 가미한 걸작이다. 사계산수도(1934, 종이에 채색, 이쾌대 유족 소장)도 남아 있는데, 4곡의 조그만 병풍 형태로 역시 서양풍을 차용한 산수화다. 1930년대 조선일보 학예부장이었던 안석주는 그의 그림에 대해 "이여성씨는 문필가로서도, 화필에도 이만한 역량이 있는가를 의심할 만큼 초인의 수완을 나타냈다"고 했다. 소설가 김기진의 형이면서 한국 근대조각의 개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김복진은 한술 더 떠 "이여성씨의 박식과 독학, 윤필(潤筆)은 세칭 범속한 전문가의 지위를 뛰어넘었다. 또한, 그와 동일하게 논할 비례(非禮)를 나는 가지고 싶지 않다"고 극찬했다.

사화가 이여성은 1930년대 말 복식사 연구자로 변신, 그 성과를 묶어 연구서로 '조선복식고(朝鮮服飾考)'를 출간했다. 광복 후 한국어로 번역, 1947년 1월에 출판했다. 이여성의 남한에서의 마지막 전시는 46년 9월11일부터 15일까지 태백공사 화랑에서 개최한 개인전이었다. 그는 이때 15폭 동양화 소품을 선보였다.

◆북한에서의 활동과 조선미술사론

이여성의 정치적 멘토는 여운형이다. 그의 동지이자 화가인 이상정의 둘째 동생 이상백도 뜻을 같이 했다. 이여성은 여운형 암살 뒤 북을 자발적으로 선택, 북한 사회주의 건설에 참여했다. 그가 북에서 연구한 조선미술사는 사회주의적 민족문화론 인식의 총화였다. 그는 48년초 월북한 뒤 그해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됐고, 57년 제2기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됐다.

하지만 그는 정치일선에서 물러나 49년 평양 고구려 안악고분 논문을 발표한 이후 다수의 논문과 '조선미술사개요' '조선 건축미술의 연구' 등의 역저를 출간했다. 특히 '조선미술사개요'는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해 출판한 최초의 조선미술사라는 데 의미가 있다. 그는 북한의 대표 학술잡지였던 '문화유산'의 편집인이자 조선역사가 민족위원회 위원이었고, 57년 김일성대학 역사강좌장을 역임했다. 하지만 그까지였다.

북한에서의 초기 학술활동은 성공적이라 할 수 있다. 6·25전쟁 전후 복구과정에서 신축 건물에 민족주의적 양식을 도입하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50년대 후반 김일성 권력의 강화과정 즉 주체사상이 대두되면서 학문·예술의 자유가 위축될 즈음 57년 중국에서의 '백가쟁명', '백화제방'의 민주주의 정책을 목격하고 이를 소개, 김일성 세력의 권력독점을 비판했다. 결과는 명약관화. 앞서 남로당파·연안파에 이어 종파주의로 비판받던 그는 소년기부터 평생 동지였던 약산 김원봉과 약수 김두전도 함께 숙청됐다. 그 과정에서 경북 선산 출신으로 대구에서 향토회·영과회를 이끈 김용준에 의해 철저히 비판받았다. 60년 김용준은 이여성의 '조선미술사개요'를 학계에서 매장했다. 김용준이 왜 동향 친구인 이여성을 탄핵했는지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는다. 다만 말년에 김용준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데서 그 원인을 짐작할 뿐이다. 김용준은 이여성을 "은폐된 민족주의와 가장한 마르크스주의"라면서 "그의 사상을 "쇼비니즘"이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이여성의 숙청은 전후 북한 사회의 예술적 경직성을 보여준다. 그는 인민 중심의 민족주의 미술사를 정립하고 발전시키자는 민족미술계승론을 주장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61년 교조주의와 민족허무주의, 부정한 계급적 비속화, 사이비 마르크스주의로 비판받아 공식적으로 그의 이론은 폐기됐다.

◆천재화가 동생 이쾌대와의 관계

이여성은 열두 살 아래 동생 이쾌대와 친밀했다. 이쾌대가 형을 좇아 월북한 것으로 봐 형제애를 넘어 예술적·사상적 동지였다. 이쾌대는 서울 휘문고 재학 중 미술 교사였던 장발(張勃)의 권유로 화가의 길을 걷게 되는데, 장발은 이여성과 터놓고 지내는 사이였다. 이쾌대가 34년 일본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후 귀국, 40년대 국내에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했을 때, 향토색과 전통성의 색채를 띤 그림을 그려 민족의식을 나타낸 것 또한 형의 영향이었다. 형의 모습을 그린 양화 '이여성'은 당시 형의 동양화론에서 영향을 받은 결과임을 부인할 수 없다. 40년대 이여성은 이쾌대와 이중섭·진환·최재덕 등 재야작가들로 구성된 신미술가협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그들의 지도자적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43년 서울 화신화랑에서 열린 제3회 신미술가협회전 기념사진에 이여성이 회원들의 중심에 서 있는 모습은 이들과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신미술가협회는 일본 관전을 중심으로 한 아카데미즘에 반기를 든 화가들의 모임이다. 조선의 향토 소재를 탐구하되 토속성과 근대성의 접점을 추구했다. 이 협회 사무실이 이쾌대의 자택이었으며 이쾌대는 이 협회의 중심인물이었다. 이여성의 영향을 받은 신미술가협회의 젊은 화가들의 활동은 '조선적인 것'을 화폭에 담으며 민족의식을 주요 화두로 삼아 작품 활동에 매진한 일종의 '저항운동'이었다. 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공동기획 : 대구광역시

▨ 참고문헌=대구미술 100년사(대구미술협회), 대구미술이 한국미술이다(이중희·동아문화), 대구독립운동사(광복회 대구지부), 신용균 '이여성의 정치사상과 예술사론' 박사학위 논문(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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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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