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관료·양반·농민·승려·노비…신분 초월 포항의병 "신명바쳐 적 토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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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 이대임은 조선 인조 13년인 1635년에 세상을 떠났고 가선대부 병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장기사람들은 정조 15년인 1791년 장기면 학곡리 학삼산 자락에 학삼서원을 창건하여 이대임의 위패를 모셨다. |
장기 선비 이눌의 청안이씨 집안
전쟁 2년 전부터 사재 털어 대비
이대임·서극인·서방경 등 가세
의병·관군과 장기성 방어에 나서
영일 김현룡·아들·동생·4촌 거병
안강으로 진격 첫 전투에서 대승
포항일원 의병장·의사 문천회맹
임란초 호국정신 표출 대표적 모임
군사 반이상 전사한 경주성 전투
시한폭탄 '비격진천뢰' 처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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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 김현룡의 재실인 월동재는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7년간의 종군을 마치고 의병을 해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은 나라에서 내린 절충장군의 품계와 두모포 만호직책을 사양하고 책을 읽고 시를 쓰면서 여생을 살다 70세로 일생을 마쳤다. |
장기의 선비 이눌은 4월14일 즉각적으로 의병을 결성했다고 전한다. 이눌의 청안이씨 가문에서는 임란발발 2년 전부터 여러 차례 회합을 가지면서 사재까지 털어 무기를 제작하는 등 전쟁을 대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눌은 장기면 서학리 출신인 이대임과 서극인, 서방경 등과 함께 장기향교에 모셔져 있던 성인들의 위패를 신창리 뒷산 용암 석굴에 숨기고 의병 수백 명을 모집해 관군과 함께 장기성 방어에 나섰다. 4월21일 경주가 왜적의 손에 넘어갔다. 경주성 함락 소식을 들은 장기의 이대임과 서방경, 영일의 심희청은 4월25일 약간의 군사들과 함께 경주로 향했다. 뒤를 이어 기계의 김광복도 경주로 달려갔다.
이틀 전인 4월23일에는 영일지역의 김현룡이 군사를 일으켰다. 아들 진성, 친동생 원룡, 사촌동생 우호, 우정, 우결이 먼저 의기투합했고, 이어 정대영, 정대용, 정대유 삼형제와 권여정, 김천목, 안신명 등 10여 명이 동참했다. 이들은 "국가가 위급함을 당하는데 신민으로서 어찌 보고만 있으리오, 신명을 바쳐 토적하리라"하고 분연히 일어났다고 한다. 영일과 장기 등 포항의병 약 500여 명은 경주관군과 합세해 4월30일 안강으로 진격, 첫 전투를 치렀다. 아군은 대여섯 차례의 교전 끝에 왜적을 곤제봉 아래로 밀어냈으며, 적 10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뒀다.
5월17일, 흥해에서도 의병이 조직됐다. 정인헌, 정삼외, 정삼계, 이열, 최준민, 이대립, 안성절 등 10여인이 모여 "왜적이 강토를 유린해 민족을 도륙하고 국보(國步)가 판탕(板蕩)하니 국가의 위급존망이 경각에 달렸다. 어찌 충의를 아는 신민으로서 구국의 선봉에 나서지 아니 하리요"라며 토벌을 맹세했다. 이들은 재물과 재산을 털어 병기를 갖추고 병사들을 모았으며 이어 군율을 정하고 진을 정비하여 출전 준비를 마쳤다. 당시 왜적의 조총에 대항하는 의병의 무기는 활, 창, 칼, 돌, 불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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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 8년인 1553년 포항 장기 사람들은 의병장 이눌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마현리 깊숙한 자리에 삼명서원을 창건하고 위패를 모셨다. 삼명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존속된 47개 서원 중 하나이며 지금도 매년 봄과 가을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
6월9일, 권여정, 김우결, 김원룡, 김천목, 김현룡, 박몽서, 서극인, 서방경, 심희청, 안신명, 이대립, 이대인, 이대임, 이화, 정대용, 정삼외, 정인헌, 진봉호, 최흥국, 호민수 등 포항 일원의 의병장과 의사들은 문천(경주 남천)회맹에 참가했다. 문천회맹은 경주, 울산, 영천, 포항 등 영남의 의병들과 경주 관군들이 문천에 모여 마혈(馬血)을 나누어 마시고 결사항전을 다짐했던 회합이다. 이때 회맹에 출전한 아군의 병력은 무려 4천200명이나 되었다. 문천회맹은 임란 초기 호국정신을 표출한 대표적인 모임으로 이후 전국 각지에서 열린 회맹의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후 영남의 의병들과 관군은 힘을 합해 여러 승리를 거둔다. 6월17일에는 남천과 경주남산에 매복해 있다가 언양에서 경주로 들어오던 왜적을 급습해 물리쳤다. 혼비백산한 왜군은 운문산으로 도망쳤으며 전사자 수는 400여명에 달했다. 7월23일, 포항의병들은 영천으로 향한다. 영천성 수복을 결의한 정세아, 정대임 등 영천 의병장들의 지원 요청에 따른 군대 이동이었다. 영천성 수복 전투에는 4천여 명의 의병과 관군이 참전했고 치열한 전투 끝에 7월 27일 왜군을 완전히 몰아내고 성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 영천성 수복으로 안동 이하의 경상좌도에 주둔하던 일본군들은 경주, 영천, 안동을 잇는 보급로가 차단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8월20일, 포항의병은 경주로 진격했다. 제1차 경주성 전투다. 이 싸움에서 김현룡의 사촌동생 김우호와 포항의병 이봉수도 적의 총탄에 맞아 순국했다. 9월7일 2차 경주성 전투에서는 화포장 이장손이 발명한 '비격진천뢰'가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일종의 시한폭탄인 비격진천뢰는 경주성 탈환에 큰 역할을 하였고 왜적은 9월 8일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경주성 수복에 기여한 포항의병은 형산강으로 돌아와 진을 정비했다. 군사들이 반 이상이나 전사한 상태였다.
포항의병들은 이후에도 경주, 울산, 영천, 대구 등지로 진을 옮겨 가면서 수년간 왜적 토벌에 공을 세웠다. 1593년 2월 당교전투, 1594년 1월 울산왜성에서의 전투, 6월 형산강전투 등이 대표적이다. 1596년 3월, 9월, 1597년 3월에는 팔공산회맹에 참가하여 정유재란에 대비했고, 1597년 7월에는 화왕산 회맹에도 동참했다. 1597년 12월에서 이듬해 1월까지 이어진 울산 전투는 처절했다. 이 전투에 참가한 김현룡의 일기가 있다. "적 100여 명의 머리를 베었으나 우리 군사도 얼어 죽은 사람이 서른이나 되었다. 이때 사촌동생 우정도 전사했다. 시신을 찾을 수 없어서 경주싸움에서 우호가 죽었을 때보다 더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1598년 11월, 조선해군이 노량해전에서 승리하면서 임진년에 시작된 7년 전쟁은 끝났다.
◆ 전쟁이 끝나고
의병장 김현룡은 7년간의 종군을 마치고 의병을 해산, 고향으로 돌아왔다. 집은 이미 재가 되어 있었다. 나라에서 그에게 절충장군의 품계와 두모포 만호직책을 내리지만 선생은 벼슬을 사양한 채 책을 읽고 시를 쓰면서 여생을 살다 향년 70세로 일생을 마쳤다. 그의 묘는 운제산 아래에 있으며 묘하 재실인 월동재는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선생은 7년간 진중에서 겪은 사실들을 중요부분만 엮어 임란일기에 남겨 놓았는데 이 자료는 당시 조상들의 구국의지와 임란 지방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여겨진다.
의병장 이눌은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 해인 1599년 3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597년 9월 팔공산 전투에서 총탄에 맞은 부상 후유증이었다. 전후 짧은 생존기간 동안에도 그는 병화와 흉년으로 시달린 백성을 구휼하고 자제들에게 충효의 길을 가르쳤다. 조정에서는 공의 전공을 높이 평가하여 장사랑훈도를 제수하였다. 포항 일출암에서 장기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마현리다. 명종 8년인 1553년 장기 사람들은 이눌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마현리 깊숙한 자리에 삼명서원을 창건하고 위패를 모셨다. 삼명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존속된 47개 서원 중 하나이며 지금도 매년 봄과 가을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의병장 이대임은 조선 인조 13년인 1635년에 세상을 떠났고 가선대부 병조참판에 증직 되었다. 장기사람들은 정조 15년인 1791년 장기면 학곡리 학삼산 자락에 학삼서원을 창건하여 이대임의 위패를 모셨다. 시간이 흘러 1948년 8월15일 백범 김구 선생은 '학삼서원'과 '경충묘' 현판을 직접 붓으로 써서 강당과 사당에 걸도록 했다. 경충묘는 '충절을 우러른다'는 뜻이다. 임란 후 왕으로부터 교지를 받은 포항 유공자는 흥해 22명, 영일 15명, 장기 12명, 청하 7명, 기계 7명, 신광 3명, 출신지 불명 9명이다. 나라를 위해 의로 일어났던 이름 없는 백성의 수는 헤아릴 수 없다.
포항 화진해수욕장에는 '썩은숭이네고랑'이라는 이름이 전해진다.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곳'이라는 의미다. 여기에는 우리 정사에 기록되지 않은 임진왜란 때의 전투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 전쟁의 어느 날 일본의 수송선이 화진 인근에 정박하고 노략질을 일삼았다. 그러자 청하 월포리의 수군만호진과 덕천리 찰방의 군사, 그리고 포항 의병이 합세하여 한밤중 화진에 있던 일본군을 기습 공격했다. 장시간의 백병전 끝에 양쪽은 거의 몰살됐고, 시신들은 백사장 한구석에 대충 묻혔다. 그곳을 '썩은숭이네고랑'이라 했다는 이야기다. 임진왜란 이후 청하군수가 이 지역에서 전사한 아군의 위령제를 지냈다고 하며 일제강점기 때는 보통학교 일본인 교장이 달밤에 '썩은숭이네고랑'을 찾아가 제단을 차리고 통곡하며 제를 지냈다는 말이 있다. 오늘날에는 포항의 한 단체인 노거수회에서 해마다 '화진불 위령제'를 지내며 모든 호국영령의 영혼을 위로해 주고 있다.
글=류혜숙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문헌=경북서원지, 포항시사, 영일군사, 포항을 빛낸 포항인물, 수월재선생일고, 임진왜란과 호남지방의 의병항쟁, 포항관내 충효열비 현황조사 및 원문번역 용역보고서, 포항문화원.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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