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환 대구경북지방중소벤처기업청장
중소기업에게 판로 개척은 곧 생존의 문제다. 기술개발에 투자하고 품질을 높여 제품을 시장에 내놓더라도 결국 판매처를 확보하지 못하면 모든 노력이 무너져 내린다. 현장에서 만나는 중소기업인들의 가장 큰 고민 역시 "좋은 제품을 만들었는데 팔 곳이 없다"는 말로 귀결된다.
따라서 공공구매 제도는 단순한 매출 기회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정부와 지자체, 공공기관이 앞장서서 중소기업 제품을 구매하는 것은 단순한 소비 행위가 아니라, '신뢰 인증'이자 성장의 발판이다. 한 번의 공공조달 실적은 해당 기업이 다른 민간시장에 진출할 때 강력한 이력서가 된다.
'공공기관에서 채택한 제품'이라는 신뢰는 판로 확대의 핵심 자산이다. 즉 공공구매는 단순한 행정 절차가 아니라, 중소기업이 성장의 사다리를 오르는 첫 단계라 할 수 있다.
대구·경북 지역은 자동차부품, 기계, 전자, 섬유 등 전통 제조업의 뿌리가 깊은 곳이다. 동시에 이차전지, 바이오, AI, 로봇 등 신산업도 속속 자리 잡아가고 있다.
그러나 많은 기업들이 여전히 초기 판로를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다. 전자부품을 생산하는 한 신생기업은 수년간 연구개발에 투자해 우수한 기술을 확보했지만, 공공기관 납품 기회를 얻지 못해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기술력은 충분했지만 '첫 판로'를 뚫지 못한 것이다.
이런 사례는 지역 중소기업에게 공공구매 제도가 얼마나 절실한가를 잘 보여준다. 특히 최근 경기 불확실성이 커지고 소비 위축이 장기화되면서,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안정적 매출을 확보할 수 있는 공공구매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민간 시장에서 수요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공공기관의 구매는 단순한 계약이 아니라, 기업 생존을 지켜주는 안정망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수치도 이를 뒷받침한다. 대구·경북 공공기관의 중소기업 제품 구매액은 2022년 13조 5천억원, 2023년 15조원, 2024년 15조 4천억원으로 매년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일부 기관에서는 관행적으로 대기업 제품을 선택하거나, 동일한 납품업체에만 기회가 집중되는 경우가 있다.
이제 지역 공공기관이 적극 나설 때다. 대구시와 경북도청, 산하기관과 지방 공기업들은 연간 수천억 원 규모의 조달 수요를 가지고 있다. 이 예산의 일부만이라도 지역의 중소기업 제품으로 채운다면 그 파급력은 대단하다.
신규 고용 창출, 기술개발 투자 확대, 청년 창업 촉진 등 지역경제 전반에 선순환 효과가 생긴다. 이는 결국 지역민의 삶의 질 향상으로 이어진다.
대구·경북은 대한민국 경제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는 지역이다. 그러나 수도권과 비교하면 인프라나 자본, 시장 규모에서 불리한 조건을 안고 있다. 이런 지역에서 공공구매는 단순한 제도가 아니라, 불균형을 완화하고 지역기업의 자생력을 키우는 강력한 정책 수단이다.
따라서 대구·경북의 모든 공공기관에 당부하고 싶다. 공공구매를 더 이상 '형식적인 의무'로 여기지 말고, 지역 중소기업의 동반자로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지역에서 만들어진 제품을 먼저 살펴보고, 가능하다면 과감히 선택해 달라. 그것이 곧 대구·경북 경제를 지키는 길이고, 지역민과 함께 성장하는 길이다.
정기환<대구경북지방중소벤처기업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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