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혁 국립치의학연구원 대구유치위원장
김밥을 먹다 보면 늘 마지막 한 조각 앞에서 잠시 멈칫하게 된다. 중심부처럼 반듯하지도 않고, 모양은 흐트러졌으며 밥알도 고르게 잡히지 않은 끝자락이다. 김과 밥, 속 재료가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길게 남아있는 그 조각은 어쩐지 미완성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쉽게 남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꼬다리는 김밥을 끝까지 먹었다는 확실한 인상을 남긴다. 이미 배가 불러 있음에도, 마지막에 남은 그 맛이 한 끼로서의 김밥의 기억을 정리해주기 때문이다.
12월이 그렇다. 한 해의 가장자리에 놓인 이달은 늘 분주하고 피곤하다. 마무리해야 할 일들이 몰리고, 약속은 겹치며, 마음은 앞뒤로 쫓긴다. 그래서 대충 넘기기 쉬운 시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12월은 가볍게 흘려보내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품고 있다. 중심에서 벗어난 시간, 끝에 남아 있어 오히려 더 또렷해지는 달이다.
언제나 새해 첫 달에는 계획이 가득하다. 새 노트의 첫 장에는 다짐이 정갈하게 적히고, 마음은 의욕으로 단단해진다. 봄이 오면 일정은 빠르게 채워지고, 여름에는 속도가 붙는다. 가을쯤 되면 잠시 숨을 고를 수 있을 것 같지만, 계절은 늘 생각보다 서둘러 지나간다. 어느새 달력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우리는 비슷한 말을 반복한다. "벌써 연말이네." 그렇게 한 해는 늘 우리보다 한 걸음 앞서 달려간다.
그러나 끝에 다다랐다고 해서 더 서둘러야 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지금이 잠시 멈추기에 가장 좋은 자리다. 이상하게도 매력적인 이 김밥의 꼬다리처럼 12월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정서가 깃들어 있다. 유난히 짧아진 낮과 길어진 밤, 괜히 많아지는 생각들. 사람들은 연말이 되면 조금 더 솔직해지고, 또 조금은 약해진다. 평소라면 삼켰을 말과 감정이 이때만큼은 마음속에서 오래 맴돈다. 12월은 그렇게 마음의 서랍을 하나씩 열어보게 만든다. 큰 김밥의 꼬다리를 급하게 삼키기보다, 한 입에 넣고 천천히 씹을 때 각기 다른 재료의 맛이 새롭게 느껴지는 것처럼, 12월은 돌아볼수록 깊어진다. 어디까지 왔는지, 무엇을 놓쳤는지, 그리고 무엇만은 끝내 포기하지 않았는지를 차분히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이다.
올해는 각자 다른 무게로 흘러갔을 것이다. 누군가는 눈에 보이는 성과를 이뤄냈고, 누군가는 그저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데 온힘을 썼을 것이다. 잘된 일보다 아쉬운 장면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마음이다. 기억은 늘 부족했던 순간을 더 오래 붙잡는다. 그래서 12월의 역할은 평가가 아니라 정리다. 성적표를 매기듯 한 해를 재단하는 달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여기까지 잘 왔다"고 말해주는 시간이다.
한 해를 잘 마무리한다는 것은 거창한 결론을 내리는 일이 아니다. 미뤄두었던 인사를 건네고, 제때 하지 못한 고맙다는 말을 떠올리는 것. 책상 서랍 하나를 정리하고, 오래 쓰지 않은 물건을 내려놓는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지나치게 엄격하지 않겠다고 마음먹는 것이다. 끝자락은 작지만, 그 작은 태도가 하루의 인상을 바꾸듯 12월의 마음가짐은 한 해 전체의 기억을 바꾼다.
바쁘다는 이유로, 지쳤다는 말로 이 달을 흘려보내기에는 12월이 품고 있는 의미가 크다. 끝을 정성껏 접어둔 사람만이 다음 장을 또렷하게 펼칠 수 있다. 마지막 한 조각을 천천히 씹을 때 남는 꼬다리의 고소함처럼, 12월을 차분히 보내는 일은 다가올 시간을 더 단단하게 만든다. 끝이어서 더 필요한 시간. 오늘만큼은 연말의 한파 속에서도 그 따뜻한 온도를 충분히 느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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