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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인터뷰]“글씨는 기술이 아니라 마음을 닦는 과정입니다”...묵향으로 계절을 쓰는 사람, 심천 이상배 서예가

2026-02-07 17:29


심천 이상배 서예가. <강남진 기자>

심천 이상배 서예가. <강남진 기자>

심천 이상배 서예가는 미리 정해진 문장을 옮겨 적는 대신, 그날 그 사람이 품은 마음에 가장 어울리는 말을 붓끝으로 풀어낸다. <강남진 기자>

심천 이상배 서예가는 미리 정해진 문장을 옮겨 적는 대신, 그날 그 사람이 품은 마음에 가장 어울리는 말을 붓끝으로 풀어낸다. <강남진 기자>

붓끝에서 번지는 먹의 농담은 때로 말보다 깊다. 종이 위에 내려앉은 한 획은 단순한 선이 아니라, 시간을 견딘 마음의 흔적이다. 전통 서예의 법도를 바탕으로 오늘의 감각을 길어 올리는 심천 이상배 선생에게 서예는 '잘 쓰는 기술'이 아니라 '천천히 머무는 태도'에 가깝다. 그는 한 획을 긋기 전, 늘 붓보다 먼저 마음을 고른다.


"글씨는 기술이 아니라 마음을 닦는 과정입니다." 짧은 한마디 속에는 오랜 수련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다. 빠름과 효율이 미덕이 된 세상에서 그는 서두르지 않는다. 먹을 갈고, 숨을 고르고, 종이 앞에 앉는 그 반복의 과정은 그에게 서예이자 수행이다. 결과보다 과정이 먼저인 이유다.


심천 이상배 선생의 글씨는 화려함보다 절제를 택한다. 과감한 장식이나 즉각적인 시선을 끄는 기교보다는 고전 서체의 기본에 충실한 필획과 단정한 구도를 중시한다. 획 하나를 긋기까지의 망설임과 결단, 그리고 여백에 남긴 호흡은 글자를 넘어 하나의 풍경을 만든다.


그는 전통을 과거로 남겨두지 않는다. 전통은 지켜야 할 틀이 아니라, 오늘을 쓰기 위한 기준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고전을 충분히 이해하고 몸에 익힌 뒤에야 비로소 자기 글씨가 나온다는 그의 말은, 서예를 넘어 모든 창작에 통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입춘(立春)을 하루 앞둔 지난 3일 문경시의 골목과 마을회관에는 봄을 부르는 붓 소리가 잔잔히 번졌다. 전통 세시풍속인 입춘방 쓰기를 매개로 주민들이 하나둘 모이자, 한동안 잊고 지냈던 공동체의 온기가 자연스럽게 되살아났다.


이날 현장에서 이상배 선생은 책상 앞에 앉아 글씨만 쓰는 역할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먼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올해는 무엇보다 건강했으면 좋겠다", "자식들이 하는 일마다 잘 풀렸으면 한다"는 소망을 차분히 듣고 나서야 먹을 갈고 붓을 들었다. 글귀는 미리 정해진 문장이 아니라, 그날 그 사람의 마음에 어울리는 말이었다.


한 자 한 자에 담긴 바람은 종이 위에서 비로소 형태를 얻었다. 정성스레 완성된 입춘방을 받아 든 어르신들은 문 앞에 붙일 생각에 얼굴 가득 웃음을 띠었다. "이 글씨를 붙여 놓으면 봄이 먼저 들어올 것 같다"는 말과 함께, 마을회관 안에는 웃음과 덕담이 이어졌다.


이상배 선생에게 이러한 현장은 전시 못지않게 중요한 작업의 일부다. 그는 서예가 작품으로만 존재할 때보다, 사람들의 일상 가까이 다가갈 때 더 큰 힘을 가진다고 믿는다. 입춘방이 문 앞에 걸리는 순간, 서예는 감상의 대상에서 삶의 일부로 옮겨간다.


그는 말한다. "전통은 박물관 안에만 있을 때보다, 사람들 문간에 걸릴 때 더 오래 살아남는다." 입춘방은 그렇게 개인의 소망을 넘어, 마을 전체의 안녕과 계절의 순환을 함께 기원하는 상징이 된다.


서예는 빠른 시대에 가장 느린 예술이다. 그러나 바로 그 느림 때문에 오래 남는다. 이상배 선생의 글씨가 전하는 힘 역시 여기에 있다. 획 하나에 담긴 집중, 여백에 남긴 침묵, 그리고 글자 너머로 전해지는 마음의 결.


묵향은 종이 위에만 머물지 않았다. 골목을 지나고, 문 앞에 걸리고,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 계절보다 먼저 찾아온 그 먹빛의 온기는, 한 해를 건너갈 작은 위안이자 오래된 문화가 여전히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조용한 선언이었다. 서예가 계절을 쓰고, 계절이 다시 사람을 잇는 순간. 그 중심에는 오늘도 묵묵히 붓을 드는 한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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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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