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닫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
    밴드
  • 네이버
    블로그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120917.010040756280001

영남일보TV

운동권 출신 인권변호사, ‘盧의 남자’에서 ‘대통령 후보’로

2012-09-17

문재인은 누구인가
‘반유신’ 투쟁 징역
노무현 통해 정치 입문
친노 수장 색깔 빼기
黨 화합 리더십 과제도

운동권 출신 인권변호사, ‘盧의 남자’에서 ‘대통령 후보’로
문재인 후보가 아내와 함께 군에 간 아들을 면회할 때 모습. 연합뉴스
운동권 출신 인권변호사, ‘盧의 남자’에서 ‘대통령 후보’로
문재인 후보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때 상주역할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
운동권 출신 인권변호사, ‘盧의 남자’에서 ‘대통령 후보’로
특전사 시절 문재인 후보. 연합뉴스
운동권 출신 인권변호사, ‘盧의 남자’에서 ‘대통령 후보’로
변호사 시절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연합뉴스


민주통합당 대선후보로 선출된 문재인 후보는 정치인의 삶을 원치 않았지만, 저서 ‘운명’ 출간 이후 일약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제1 야당의 대선 후보로 급부상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평생 친구로,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민정수석, 비서실장을 거치는 등 그가 지금의 자리에 오른 데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후광이 있었지만 이제는 ‘대선 후보 문재인’으로 발돋움하게 된 것이다.

문 후보는 1953년 1월 경남 거제에서 2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함경도 흥남이 고향이던 부모가 6·25 전쟁 발발 후 1950년 12월 ‘흥남 철수’ 때 잠시 난을 피한다는 생각으로 월남한 것이 남한 정착으로 이어졌다.

경남중·고를 거쳐 1972년 경희대 법학과에 진학했다. 중·고교 때 별명은 ‘문제아’였다. 이름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술·담배를 입에 대고 4번의 정학을 받았다고 한다.

대학 시절에는 ‘반유신’ 투쟁에 나선 운동권이었다. 1975년 학생회 총무부장으로서 시위를 주도하다 징역 8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고 학교에서도 제적됐다. 석방되기 무섭게 강제징집돼 특전사 수중폭파요원으로 복무했다.

문 후보는 1978년 제대 후 사법시험을 준비해 22회(1980년)에 합격한 후, 1982년 부산에서 ‘노무현·문재인 합동법률사무소’를 계기로 노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시작했다. 이후 두 사람은 각종 시국사건 관련 변호를 맡으며 진보 개혁 성향의 변호사로 이름을 알렸다.

부산·경남 민변(민주화변호사모임)을 창립하고, 부산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장, 천주교 인권위원회와 부산 NCC 인권위원을 맡았다. 1985년에는 부산민주시민협의회(약칭 부민협)를 창립하고, 1987년에는 6월 항쟁의 주역이 된 부산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약칭 부산 국본)를 만들어 상임집행위원을 맡았다. 그는 노무현 변호사와 함께 한 6월 항쟁의 기억을 큰 보람으로 여긴다고 저서 ‘운명’에서 술회했다. 노무현 변호사가 1988년 총선에서 당선되며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된 이후에도 문 후보는 부산에 남아 시국·노동사건을 도맡았다.

문 후보가 정치권에 입문한 것은 2002년 대선부터다. 노무현 후보의 부산선대위 본부장을 맡으면서 극적 반전드라마에 힘을 보탰고, 참여정부 출범 후에는 민정수석, 시민사회수석, 대통령 비서실장을 역임하면서 노 대통령을 최측근에서 보좌했다.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때는 직접 서거 사실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브리핑을 했고, 국민장의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으면서 영결식까지 실질적 상주 역할을 했다. 이후 노무현재단 이사장과 혁신과통합 상임대표를 역임했다.

특히 지난해 6월 발간한 자서전 ‘운명’이 베스트셀러를 기록하고, 올 초 방송된 예능프로그램에서는 소박하고 소탈한 모습이 대중에게 전해지며 인지도와 지지율이 크게 뛰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고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입문 제안도 물리쳤던 그의 마음이 움직였다.

결국 정권교체라는 대의명분을 내걸고 지난해말 야권대통합에 참여해 민주통합당 창당에 일조하고, 지난 4·11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 나와 당선된 후 대선후보의 길로 들어섰다.

총선에서는 이른바 ‘낙동강벨트’인 이 지역에서 민주당이 3석을 얻는데 그치면서 승리를 이끌지 못했다는 평가와 반대로 새누리당의 텃밭인 부산에서 평균 40%를 웃도는 득표율을 견인했다는 엇갈린 평가를 받기도 했다.

앞으로 문 후보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노무현의 비서실장’이라는 닉네임을 떼어내고 ‘대통령 후보 문재인’을 제대로 각인, 당내 화합과 국민통합을 위한 리더십을 보여줄 수 있을 지 주목된다.

이영란기자 yrlee@yeongnam.com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관련기사

정치 인기기사

영남일보TV

부동산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