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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北가족 만날 수 있을지…”

2015-08-29

■ 번번이 상봉 무산에 속태운 대구 신언식 할아버지

“이번에는 北가족 만날 수 있을지…”
정부가 남북 이산가족 상봉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는 가운데, 28일 북한에 가족을 두고 온 실향민 신언식씨가 대구 수성구 범어동 자택에서 6·25전쟁 직전 가족을 북에 두고 남한으로 내려오게 된 과정을 얘기하고 있다. 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명절마다 ‘성사 안 돼 죄송’
대통령들의 편지만 쌓여
어머니·부인·딸과 긴이별
“이렇게 될 줄 알았겠어…”

북한에 가족을 두고 온 신언식씨(87·대구 수성구 범어동)는 남북이 이산가족 상봉에 대한 논의를 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듣고도 반신반의하고 있다.

신씨는 늘 북에 있는 가족을 만난다는 건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명절 때마다 ‘이산가족 상봉을 성사하지 못해 죄송하다’는 내용이 담긴 대통령의 편지만 수북이 쌓여 갔다.

황해도 평산이 고향인 신씨는 19세이던 1947년 월남했다. 신씨의 어머니는 고향에 남겠다고 해, 어린 딸과 부인 이성득씨(당시 22세)만 데리고 연백군(현재 황해도)으로 내려왔다. 당시 연백군은 남한에 포함됐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신씨는 전쟁에 참가했다. 북파공작첩보부대인 ‘켈로(KLO)부대’에서 북한 측 정보를 수집해 오는 역할을 맡았던 것. 켈로부대는 북한 지역 출신으로만 조직된 첩보부대로, 6·25전쟁 동안 비밀작전을 주로 수행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는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북한군 장교 복장을 하고 남북을 오갔다. 작전 수행 중 중공군의 총탄에 다리를 맞아 생사를 넘나든 적도 있었다. 당시 마을 주민들이 응급조치를 한 덕분에 겨우 목숨을 구했다.

한 차례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고도 그는 북에 있는 어머니를 찾아 나섰다. 신씨는 “황해도에 찾아갔을 때 어머니는 ‘살려면 얼른 가라’며 나를 쫓아내셨다”며 기억을 떠올렸다.

전쟁이 끝나고 그는 남한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부인과 딸은 북한 땅이 되어버린 연백군에 남겨졌다. 어머니에 이어 부인과도 생이별을 하게 된 셈이다. 홀로 대구에 내려온 그는 특수부대에서 전역한 뒤 30대 중반 뒤늦게 다시 결혼해 아들·딸을 낳고 건축업에 종사하며 살아왔다.

새 가정을 꾸리고도 북한에 두고 온 가족을 완전히 잊지는 못했다.

이산가족 상봉 초창기인 1980년대, 그도 대한적십자사에 상봉 신청을 했다. 당시 만나길 원했던 가족은 어머니 최송도씨, 부인 이성득씨, 남동생 신언영·언선씨, 딸 충화·충자씨, 5촌 조카 신승철씨다. 세월이 너무 흐른 탓에 어머니와 부인 이씨는 살아 있을지 확신이 없다. 다만 두 딸과 5촌 조카, 남동생은 만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신씨는 “방송에서 이산가족 6만명을 재조사한다니까 이번에는 상봉이 이뤄질 것 같기도 하다”고 말했다.

 

주름이 깊이 팬 그의 눈가는 금세 촉촉이 젖어들었다. 그는 “14세 어린 나이에 결혼해서 철없는 짓도 많이 했는데, 이렇게 될 줄 어떻게 알았겠냐”며 말을 잇지 못했다.

 

한편, 이산가족정보통합시스템에 따르면 1988년 이후 지난 7월 말까지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 수는 12만9천698명으로, 이 중 51%(6만6천292명)만이 생존해 있다. 이들 중 3천503명이 대구·경북에 거주한다.

 

최미애기자 miaechoi21@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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