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 첫 학생 농촌봉사단
1959년 10월24일
대학·고교 남녀학생 공동결성
1∼2개월 뒤 고교생 중심 활동
50여년 전 새날동지회 회원들. 10대 후반~20대 초반의 청춘들이다. 노백무 초대 회장(윗줄 왼쪽에서 두번째)과 장주효 회원(아랫줄 맨 왼쪽) 등이 대구지역 고교생 후배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
지난 8일, 대구시 중구 북성로 믹스카페에서 만난 새날동지회 회원들. 지금은 70대 초·중반의 나이가 됐다. 장주효·김영배·신영섭·이기윤·노백무씨(왼쪽 아래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가 지난 날을 회상하며 미소를 짓고 있다. |
‘일은 내가, 영광은 너에게.’ ‘사리와 사욕에 노하는 고양이가 되지 않고, 정의와 대공(大公)을 위하는 호랑이가 되자.’
1959년 10월24일 창립한 ‘새날동지회’(이하 새날)의 강령과 신조다.
새날은 대구지역 대학생과 고교생이 중심이 돼 만든 대구·경북 최초의 학생 농촌봉사활동 단체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선각자들이 펼친 농촌계몽운동의 전통을 이어받아 브나로드(러시아어로 ‘민중 속으로’란 뜻)운동을 실천하려 했다. 새날은 정부나 기관이 나서서 조직한 관변단체가 아니라 학생 스스로 뜻을 모아 창립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새날의 창립을 주도한 인물은 경북대 농대생 박무현, 박승열, 문승규를 비롯해 신등부(경북고), 최정지(경북여고), 권혁자(경북여고), 장사희 등이다. 1~2개월 뒤 장주효(대구고), 최용호·노백무(경북대 사대부설고) 등이 입회함으로써 대학생이 아닌 고교생 중심으로 활동이 이어졌다.
새날이 태동할 무렵 한국사회는 6·25전쟁의 참화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상황이었다. 경제적으로 농촌지역은 도시보다 훨씬 피폐했으며 낙후됐다. 5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문맹퇴치운동이 시작됐으나 농촌 구석구석까지 파급력이 미치지 못했다. 당시 엘리트 고교생은 지역사회에서 지식인으로서의 역할도 함께 수행했다.
‘무한한 시공 속에 이루어져가는 인간사의 혁명과 새 역사의 창조를 위해 바르게 보는 눈, 바르게 생각하는 마음, 깊게 가는(耕) 힘과 하느님의 섭리를 깨닫는 순결한 현명을 길러 이 역사에 부여된 민중의 짐을 기꺼이 짊에 기본정신을 둔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 현 단계로서 농촌활동에 중점적 역할을 하기로 다짐한다.’
새날은 위의 창립취지문 이외에 ‘참되게 살자’ ‘힘차게 살자’ ‘하나로 살자’ ‘이상에 살자’와 같은 구호를 만들고 회가(전상렬 시인 작사)도 지었다.
광명은 즐거워라. 넘치는 환희
맹세여 기도하자 기쁨은 오라.
저 멀리 울려오는 새벽 종소리
이상은 멀고 높다. 참뜻은 굳다.
보아라 푸른 하늘 빛나는 태양
새날은 우리의 것 우리는 새날
흙냄새 무르익은 싱푸른 지성
일하는 가슴마다 샘 솟는 기쁨
우리는 일하고 영광은 너에게
이 겨레 복되어라 새날은 오라.
60년 1월, 노백무가 초대회장이 되면서 새날 회원은 겨울방학을 이용해 첫 농활을 시작했다. 새날 회원 가운데 고교 2학년이었던 장주효, 최용호 등은 60년 4·19혁명의 촉매제가 된 2·28민주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다. 2·28민주운동이 끝난 뒤 하청일, 이대우, 윤무한, 손진홍, 김영배, 이기윤, 구국본, 함병수 등이 입회해 새날은 활기를 띠었다. 이들 가운데 이대우는 경북고 학생부위원장으로 2·28을 이끌었으며 역시 경북고생이었던 하청일은 2·28선언문을 썼다. 손진홍(대구고)은 장주효와 함께 대구고의 참여를 주도했다. 노백무 역시 대구고 1학년 학생부위원장으로 참여했다. 2·28민주운동을 기획했던 2학년들은 경북고 42회, 대구고 1회, 경대사대부고 10회 출신이다.
이번 호 커버스토리는 대구·경북 최초로 ‘학생농활’에 참여한 새날 회원에 관한 이야기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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