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날동지회의 신조 시대정신에 투철…일부 회원은 2·28운동 주도적 참여”
2·28행사 물량주의로 흐르면 안돼
작금의 비민주적 정치·사회현상에
2·28단체가 당당하게 태도 밝혀야
새날 회원이 성주군 수륜면으로 농촌봉사활동을 하러 간 가운데, 마을 주민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새날 회원이 경북지역에 있는 한 농촌을 찾아 어린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있다. |
새날동지회 회원인 장주효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초대회장(73)은 새날의 강령을 몸소 실천하고자 했다. 그는 중국 지린(吉林)성 푸순(撫順)에서 태어나 5세 때 부친을 따라 경산에 와 대구에 정착했다. 중앙초등, 경상중을 거쳐 대구고 2학년 때에는 2·28민주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이후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을 두루 거치면서 질곡 많은 대구현대사의 산증인이 된다. 장 회장은 대구지역에서 ‘어른’으로 꼽히는 몇 안 되는 인물 가운데 한명이다. 경북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그는 한때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으로 서대문교도소에서 복역하기도 했으며, 새대구 경북시민회의 공동대표, 팔공문화원장, 대구사회연구소 이사 등을 지냈다. 젊은 시절 4년간 지역에서 신문기자를 하기도 했던 그는 대구은행 지점장과 인재양성원장으로 일했으며 학교법인 영광학원(대구대 재단) 이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2010년 고희(古稀)의 나이에 대구대에서 지역개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따 주위를 놀라게 했다.
지난 한글날, 대구시 남구 봉덕동에 있는 그의 집을 찾았다. 70대 중반의 나이에도 꼿꼿한 딸깍발이 정신을 잃지 않았다.
▲새날동지회와 2·28민주운동은 어떤 관계가 있나.
“2·28이 일어나기 1년전, 그러니까 1959년 10월24일 새날이 태동했다. 난 대구고 후배 노백무, 경북대사대부고 최용호와 함께 1~2개월 뒤 새날에 가입했다. 처음 발기했던 대학생들은 우리가 들어감으로써 박무현씨만 제외하고 거의 다 빠졌다. 새날의 강령과 신조, 취지문을 읽어보면 회원들이 가졌던 시대정신을 엿볼 수 있다. 농촌봉사활동과 농촌계몽운동이 중심이었다. 새날이 특별히 2·28민주운동과 결부됐다곤 할 수 없다. 하지만 새날의 모토처럼 바르게 보는 눈, 바르게 생각하는 마음, 역사에 부여된 민중의 짐을 기꺼이 지겠다는 정신은 2·28정신의 맥락과 닿아있다. 실제 최용호와 노백무, 그리고 나도 2·28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지금은 고인이 된 손진홍, 이대우, 하청일도 2·28 주역으로서 새날의 회원이 돼 열심히 활동했다.”
▲세계사적으로 고교생이 민주화운동을 주도한 경우는 보질 못했다. 그러기에 2·28민주운동은 대구의 자랑 가운데 하나이며 대구시민정신으로 자리매김해도 된다고 본다. 2·28 이전에도 대구지역 고교 간부학생이 모임을 자주 가졌다던데.
“2·28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59년, 경북도 학무국 주최로 포항 동지상고에서 경북도내 중·고등학교 남학생 간부연수회가 열렸다. 당시 임종률 장학사가 지도를 했는데 회의진행법 같은 것을 배우고 학생끼리 시국토론도 했다. 경북고 이대우, 대구고 이성실, 경북대사대부고 최용호, 경북중 이종훈, 함병수 등과 자주 만났다. 당시는 정치과잉시대라고 할 만하다. 고등학생의 역사의식과 정치의식이 지금과 달리 무척 고양돼 있었다. 미국식 민주주의 교육제도에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으며 학교에서도 토론수업이 활발했다.”
▲2·28때 어떤 역할을 했나.
“이대우는 경상중 2·3학년 때 같은 반을 했으며 단짝 교우였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학교는 달랐지만 절친한 사이였다. 손진홍은 대구고 2학년 학생위원장이었는데 선거 때 그를 적극 지원했다. 나는 두 사람을 잇는 고리역할을 했다.”
▲55년 전에 일어난 2·28민주운동을 어떻게 평가하나.
“고인이 된 이해봉 전 국회의원이 2009년 국회에서 ‘2·28은 4·19혁명의 시초’라는 요지의 대표 발의를 함으로써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 개정안이 국회 통과됐다. ‘학원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 ‘우리에게 자유를 달라’ ‘민주주의를 실현하라’는 구호에서 정의, 자유, 민주의 이념적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이승만 독재정권에 맞서 순수한 고등학생들이 중심이 돼 조직적으로 모의하고 투쟁한 민주화운동이다.”
▲2·28기념회관이 설립되고, 2·28이 대구시민정신으로 자리매김하는 등 발전해 왔다. 어떻게 생각하나.
“정의, 자유, 민주정신을 대구시민정신으로 표방하고 그 의미를 진작시키기 위한 각종 노력에 찬사를 보낸다. 하지만 기념사업회를 비롯한 회원들이 2·28을 지나친 물량중심주의로 흐르게 해선 안 된다. 또 관이 주도하는 행사중심의 운영도 반대한다. 2·28때 가졌던 초심과 정신을 망각하지 않도록 긴장해야 한다.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2·28선언문을 초안한 하청일의 경우 당시 경찰에 끌려가 강압적인 수사를 받았으며 그 여파로 정신이 피폐해짐으로써 본인과 가족이 많은 고통을 받았다. 그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현재 2·28기념사업회를 비롯한 대구시민이 2·28정신을 올곧게 계승하고 있다고 보나.
“작금 대구·경북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히 비민주적인 정치·사회현상에 대해 2·28단체가 당당히 태도를 밝혀야 한다. 예를 들어 지난해 열린 경북대총장선거에서 총장당선자가 두 차례나 대학구성원과 지역 대표기관 대표에 의해 선출됐음에도 교육부 당국이 납득할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임명하지 않은 처사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것은 잘못됐다. 그건 사법부에서도 부당하다고 판결했다. 2·28단체가 이같은 비민주적 행태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2·28민주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구성원의 다양한 의사를 존중하고 인정해야 함이 원칙이며 언론자유를 최우선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대구지역 언론계를 비롯해 정계, 학계, 각 사회단체는 남과 다른 의견을 인정하지 않고 지나치게 편향된 가치관으로 지역사회를 재단하려 한다. 그런 태도를 보임으로써 다른 지역으로부터 ‘보수꼴통의 도시’ ‘정치적 섬’이니 하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이같은 비민주성을 바로잡는 역할을 2·28이 담당해야 한다. 그래야만 후손에게 부끄럽지 않다.”
그는 인혁당사건으로 정치적 사형을 당한 여정남과는 경북대 정치학과 동기다. 장 전 회장은 재학시절 ‘현대사상연구회’라는 서클을 만들고 한·일 굴욕외교 반대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경북대와 ROTC에서 조건부 제적을 당하기도 했다. 장준하, 김도현 등과 민족학교를 설립하기도 한 그는 78년, 노동운동을 하다 서울 남양동분실에 끌려가 14일간 조사를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을 했다. 그는 서울에서 공안당국이 명명한 과학적 사회주의 노동운동을 하면서 손진홍, 임무현, 김수행, 윤무한 등과 활동하기도 했다. 장 전 회장에 따르면 당시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는 막내로 참가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이승만 동상을 광화문에 세우고 수도권집중개발을 주창하는 사람이 대구에 내려와 다 지은 밥에 숟가락을 얹으려 하고 있다며 김문수의 최근 처신을 비판했다.
▲70대 중반에 접어들었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다고 생각하나. 또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나.
“무엇이 되고자 의도적으로 도모한 적이 거의 없다. 어떤 상황이 전개되면서 그 자리에 서 있게 되었을 뿐 내가 해야 할 역할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의롭지 못한 일에는 늘 분노하고 행동했다. 그렇다고 남다른 용기와 추진력, 뛰어난 신념이 있다고 생각되진 않는다. 하지만 순수하고 명징하게 지켜야 할 가치를 지키고 싶다. 늘 잔잔해지려고 노력한다. 역할이 끝나면 직장이든 단체든 근처에 어슬렁거리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욕심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건 진정으로 뒷사람을 위하는 길이 아니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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