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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② ‘새날동지회’ 의 결성과 활동

2015-10-16

“잡지 사상계나 신문사설 읽지 않으면 친구들과 대화에 끼지 못할 정도”

② ‘새날동지회’ 의 결성과 활동
새날동지회 회원이 낙동강변에서 ‘원귀마당쇠’라는 마당극을 연습하고 있다. 이 연극은 대구 최초의 마당극이라고 알려진다.
② ‘새날동지회’ 의 결성과 활동
새날 회원이 건립하려던 회관(대구시 수성구 범어네거리 부근). 하지만 태풍과 자금난으로 완공을 보지 못했다.

창립 55주년…전국회원 100여명

아무나 가입 못했던 새날동지회
대구지역 고교생의 선망의 대상
대구농고 학생들의 참여도 높아

‘새날’지향점 새마을운동과 통해
대구경북 지역과 창녕·거창 등서
농사일 거들고 문맹퇴치 운동도

정기간행물 ‘흙냄새’‘모닥불이’내
대구 첫 마당극 ‘원귀마당쇠’공연


새날은 60년대 말까지 지속됐다. 회원들은 고교 졸업 이후에도 지금까지 인연의 끈을 놓지 않고 매년 대구, 서울, 부산, 포항 등지에서 기념식을 하며 학창시절 다짐하고 실천했던 새날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 전국의 회원은 100명 정도다. 지난해 창립 55주년 기념식을 하면서 고인이 된 하재홍, 손진홍, 하청일, 이대우 등 회원의 제사를 지냈다. 올해는 오는 23일 경기도에서 1박2일간 창립 56주년 기념행사를 한다. 매년 주제를 정해 발표하는데 올해는 ‘스마트 에이징’으로 정했다. 노년을 더 건강하고, 더 즐겁게, 더 행복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하자는 의미다.

“당시 고등학생들은 지금보다 덩치는 작았지만 지적으로, 정치·사회적으로 훨씬 성숙했습니다. 지식인의 교양잡지인 사상계나 신문의 사설을 읽으며 열띤 시국토론을 벌이곤 했지요. 사설을 읽지 않으면 학교에서 친구들과의 대화에도 끼지 못 할 정도였습니다. 함석헌, 유달영, 김형석 선생의 글과 심훈의 상록수를 애독했습니다.”

새날의 2대 회장인 김영배씨의 회고다. 1961년 그가 회장을 할 당시 대구시 수성구 범어동에 새날 회관을 건립하려는 시도를 했다. 하지만 그해 불어닥친 태풍 때문에 건축 중이던 건물이 붕괴된 데다 자금난도 겹쳐 완공을 보지 못했다. 새날 회원은 대구주변 달성군 가창면을 비롯해 성주, 군위, 울진, 경주, 문경, 창녕, 거창 등 영남지역에서 농활을 했다. 이들은 농민과 함께 논매기를 하는 등 농사일을 거들고 밤에는 야학을 하며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문맹퇴치운동을 벌였다. 겨울에는 팔공산을 찾아 일주일간 등산을 하며 체력을 단련 했다. 소설 상록수의 여주인공 채영신이 활동했던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 샘골마을을 방문해 새날의 창립정신을 되새기기도 했다.

새날을 지도했던 교사와 공무원도 있었다. 이발형(경북(여)고), 이목(경대사대부고), 박세진(대구농고), 김재덕(대구사범학교), 김병찬 경북도 학무과장, 권준호 광복회 전 대구경북지부장 등이 그들이다. 새날은 ‘흙냄새’와 ‘모닥불이’ 같은 정기간행물을 발간했으며, 1963년 케이지(KG)홀(현 시민회관 자리)에서 ‘원귀마당쇠’란 마당극을 하기도 했다. 대구연극사에선 원귀마당쇠를 대구지역 최초의 마당극이라고 본다.

“당시 서울대 학생이던 조동일 교수가 작품을 썼고, 공연에도 상당한 도움을 주었습니다. ‘사대주의 살풀이’ 같은 내용으로 ‘서울대 향토개척단’에서 공연했던 것을 재구성해 대구에서 공연하게 됐지요. ‘원귀마당쇠’는 일종의 ‘시대 풍자극’입니다. 마당쇠역은 함병수, 주인공 변학도역은 이종훈이 맡았습니다. 고인이 된 최병진씨가 뒷일을 맡아서 했고 배우로는 김장부, 원홍길, 손태익, 이희권, 구국본 등이 참여했지요. 고교생이 중심이 됐으며 탈을 신문으로 손수 만들었습니다. 관객이 500명 정도 됐는데 참 대단했지요.”

연출을 맡았던 장주효씨의 말이다. 새날은 당시 고교생 사이에 인기있는 동아리였다.

“경북고, 대구고, 경북대사대부고, 대구농고, 경북여고, 대구여고 등 당시 대구지역의 고등학생에겐 선망의 대상이 됐던 동아리였습니다. 가입도 아무나 하지 못했습니다. 회원 간에 정과 의리도 깊었습니다. 가난한 학우를 위해 돌아가며 등록금을 대기도 했지요. 학창시절 새날에 너무 빠져든 학생은 대학을 가는 데도 애를 먹었습니다. 단박에 대학에 진학한 경우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 재수, 삼수를 했지요. 허허허.”

새날은 농촌봉사활동단체였던 만큼 대구농고(현 대구자연과학고) 학생의 참여도도 높았다.

“육종학의 권위자인 문헌팔 현 한국종자포럼 이사장을 비롯해 손태익, 이희곤 선배님이 대구농고 출신이었습니다. 특히 문 선배께선 통일벼를 개발하는 데 기여를 많이 했지요. 선배들이 공부 잘하고 똘똘해보이는 후배를 스카우트해 새날에 가입을 시키기도 했습니다.”

신영섭씨(69)는 새날 회원으로 당시 대구시 수성구 황천동(현 황금동)에서 ‘애향4H클럽’의 회원이었다. 그는 4H클럽이 추천한 유학생 자격으로 미국무성의 초청을 받아 1971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캐나다 포드자동차에서 5년간 근무하다 부동산사업과 레스토랑 등을 경영했다. 그는 2009년 38년간의 미국생활을 처분하고 귀국해 새날의 일을 돕고 있다.

노백무 새날 초대회장은 대구고 1학년 때 2·28민주운동에 참여했다. 학생회 부위원장으로 이미 학교에선 요주의 인물로 찍힌(?) 학생이었다.

“1학년은 그때 다 운동장에 집합해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저에게 다가와 ‘노군은 조용히 있으라’고 하더군요. 그말에 오히려 반감이 들었습니다. 2학년 선배를 따라 ‘나가자’ 하며 외쳤지요.”

노 전 회장은 고교졸업 후 서울대 문리대에 진학하려고 했으나 대구교대로 방향을 틀었다. 졸업 후 대구시에 있는 초등학교로 갈 수 있었으나 64년 초임으로 울진군을 선택했다. 고교시절 농활을 하면서 농촌의 현실을 잘 알기에 농촌에서 꿈을 펼쳐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울진군 원남면 갈면리 갈면초등학교 등지에서 새마을 주임교사를 하며 농민과 함께 마을길 넓히기, 지붕개량에 적극 참여했다.

“새날은 새마을운동의 전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70년부터 정부 주도하에서 새마을운동이 시작됐지만 그 뿌리를 찾아가면 새날을 뺄 수 없습니다. 새날 운동의 지향점이 농촌봉사활동 아닙니까.”

그는 82년 경산군으로 들어와 구미와 포항에서 각각 교감과 교장을 역임했다. 퇴직을 1년 앞둔 2003년, 그는 제29회 경북초등교육상 본상을 수상했다. 그는 장학관을 거치지 않고 본상을 수상한 교육자는 자신이 처음이라고 했다. 41년간 교직생활을 하면서 항상 새날 회원으로 긍지와 자부심을 가졌다. 최근에는 대구시 수성구 수성우방팔레스 아파트의 노인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노인회 간부 가운데 군인 출신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가치관의 다양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아래로부터의 의사결정을 중시하기보다 위에서 하달하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그건 잘못된 겁니다”고 했다. 그는 건배사를 할 때 (멋)있고, (품)위있는 (어)른이 되자는 의미에서 ‘멋품어’라는 구호를 외친다고 했다.

김영배 2대 회장은 경대사대부고 재학 때 문학에 심취해 문예반장을 했다. 새날의 간행물인 ‘새날파수꾼’의 편집을 맡기도 했다. 그는 고교시절 학교수업이 시시해 한달간 수업을 빼먹고 경북대 철학과 하기락 교수의 강의를 듣기도 한 괴짜 학생이었다. 고교 졸업 후 건국대에 입학해 축산과, 법학과를 다니다 화공학과를 졸업하고 계명대 대학원에서 국민윤리과를 전공했다. 그 시절 재수학원의 강사로 출강하기도 했다.

“휴일 아침엔 대구 칠성시장 등지에서 청소를 했습니다. 농활을 할 땐 돼지우리 청소도 하고 김도 맸습니다. 가축 사일로도 만든 기억도 납니다. 아마 ‘새날 운동’은 새마을운동의 시초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농촌이 살고 농업이 일어나야 나라가 발전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요. 고등학생치곤 꽤나 성숙했습니다.”

이기윤씨(70)는 경대사대부고 시절 안신자씨의 추천으로 새날에 가입했다. 봉사활동엔 빠짐없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고교졸업 후 몸이 아파 한동안 고생을 했던 그는 묘목사업 등을 하다 영남대 영문과를 졸업한 뒤 대구와 경북지역에서 영어교사를 했다. 사진에도 심취한 그는 새날 행사 때마다 촬영을 전담한다. 그는 “새날에 가입하고 동지들을 사귄 건 인생의 기쁨이었다”고 회고했다.

경주시 양북면 와읍리에서 ‘새날농장’을 경영하고 있는 김정철씨는 ‘새날’이 곧 자신의 인생 지표였음을 밝혔다. 그의 자택 앞 새날농장 표석엔 새날의 회가가 새겨져 있다. 중학교 2학년 때 농부가 돼 고향 땅을 지키기로 결심한 그는 경대사대부고 1학년 때 장래희망을 묻는 담임선생님의 질문에 유일하게 ‘농업’이라고 답할 정도로 농촌을 아끼고 사랑한다. 고교시절부터 ‘도시락에 밥톨 안 남기기’ ‘시내버스 타지 않기’를 실천하며 자연친화적인 생활습관을 몸에 익혔다. 고2 때 새날에 가입한 그는 회원들과 방천시장 청소봉사활동부터 시작했다. 당시 복숭아 과수원이었던 수성구 범어동과 고향에서 농활을 했다.

고려대 농과대학에 입학한 그는 4H연구회에 가입을 하고 전국대학 농어촌문제연구연합회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당시 4H연구회 회원을 자신의 고향 인근으로 데려와 농활을 하기도 했다. 군대에서 장교로 근무한 그는 전역 후 낙향해 경운기를 구입하는 등 본격적인 농촌생활을 했다. 주위에선 좋은 대학 나와 ‘똥을 푸는 미친X’이란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는 70년 양북면 내 독농가를 모아 ‘녹지회’라는 영농단체를 만들어 농사정보와 친목을 도모했다. 그는 국유림에 특수목을 식재하고 야산에 감나무와 밤나무를 심었으나 모두 실패했다. 또 엽연초와 사과나무를 심고 닭과 돼지를 기르기도 했다.

그는 8년간 경북낙농축산업 협동조합장을 하면서 목우촌 우유공장을 건립하고 목장에 젖소와 엘크와 래드사슴을 기르기도 했다. 김씨는 현재 낙농사업을 중단하고 한우를 사육하고 있다. 한편으로 2011년 계수장학회를 설립하고 ‘나의 신작로’ ‘푸른 다리로 간다’ 등의 저서를 발간하기도 했다.

회원들은 교수, 언론인, 고위 공무원, 의사 등으로 사회에 다양하게 진출했다.
글 =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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