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언어가 어려워졌다...외국어 남용 실태
언어 격차 키우는 것은 대구·경북도 마찬가지
<게티이미지뱅크>
"선배는 에겐녀예요? 테토녀예요? 아자쓰!"
직장인 A(여·42·대구 효목동)씨는 20대 후배들의 질문에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말끝마다 붙는 '아자쓰!'는 일본어로 '감사합니다'라는 뜻인 '아리가또 고자이마스'를 줄인 말이라는 걸 검색해보고서야 알았다고 했다. '고맙다'는 뜻으로 쓴 게 아닌 감탄사의 하나로 쓴 말이었다.
A씨는 "에겐과 테토는 얼추 알겠는데, '아자쓰'는 도저히 무슨 말인지 몰랐다. 세대차이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라며 "외래어 또는 외국어가 변형되는가하면, 한글과 결합되면서 희한한 말들이 넘쳐나 그 뜻을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지경이 됐다"고 했다.
'에겐녀' '테토녀' 또는 '에겐남' '테토남'은 외래어인 '에스트로겐'(여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남성호르몬)에 남, 여를 붙인 말이다. 성호르몬에 따른 특징을 바탕으로 성격을 분류하는 신조어다. '에겐'은 여성성을 강조한 말로 감정·섬세·배려를 상징한다. 반면 '테토'는 남성성이 두드러지는 강인하고 씩씩한 성향을 의미한다.
외래어·외국어의 무분별한 사용은 어느새 일상이 됐고 이를 더 줄이거나 한글과 혼합돼 만들어진 신조어들까지 확산하고 있다. 문제는 이 같은 외래어·외국어 남용이 공공영역까지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는 점이다.
외래어·외국어 남용을 줄이기 위해선 우선 이 둘의 차이를 구분해야 한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를 보면 외래어는 외국에서 들어온 말이지만 국어에서 널리 쓰이는 단어로 버스, 택시, 시소, 리어카, 컴퓨터, 마우스, 커피, 오렌지, 피아노 등이 있다. 외국어는 우리말 체계에 들어왔다고 보기 어려운 원어·약어·미번역어를 말한다. 밀크, 블루, 뮤직, TF, CEO, FAQ 등이 대표적이다.
◆ 대구시·경북도도 '외국어 남용의 늪'에
출처: 대구시청, 경북도청 보도자료
대구시청과 경북도청이 올 들어 최근까지 발표한 보도자료에서 외래어, 외국어, 외래어 기반 신조어 남용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번 분석에선 외래어나 외국어의 사용을 문제 삼거나 설명하기 위해 인용된 표현, 법령명, 제도명, 기관명 등 공식 고유명사, 현실적으로 대체 표현이 없는 전문용어는 제외했다.
영남일보가 AI를 활용해 2025년 대구시와 경북도에서 발표한 보도자료를 문장 단위로 분석한 결과, 분석 대상(제목 포함) 7천852개 문장 가운데 시민 이해와 불필요한 외래어·외국어가 1개 이상 포함된 문장은 1천492개로 나타났다. 이는 전체 분석 대상의 19%정도다.
공공기관 업무 추진 과정에서 관행적으로 사용되는 행정·정책 용어가 35%로 가장 많았다. 실례로 TF(대체어로 전담반), MOU(업무협약), 원스톱(일괄, 통합), 로드맵(종합계획), 거버넌스(민관협력) 등이 있다.
신산업 육성 및 기업 지원 관련 보도자료에서 빈번히 사용된 R&D(연구개발), 플랫폼(구조, 매개체), 클러스터(집적단지), 테스트베드(시험장), 스타트업(신생창업기업), 인프라(기반·토대) 등 산업·기술 용어(30%), 콘텐츠(제작물), 페스티벌(축제), 팸투어(초청관광), 투어(관광) 등 축제 및 관광 홍보, 행사 기획 관련 문화·관광·행사 용어(25%)가 그 뒤를 이었다.
외래어·외국어로 굳이 쓸 필요가 없는 팩트(사실), 피드백(의견·반응), 모니터링(점검·관찰), 니즈(수요·요구) 등 일상·생활 용어는 10%를 차지했다.
일반 시민이 쉽게 이해하기 어렵게 외국어로 결합된 신조어도 심심찮게 사용됐다.
경북도가 보도자료에서 사용한 '블레저'(bleisure/business와 leisure를 합친 신조어), '브라운 백 미팅'(Brown bag meeting·갈색 종이봉투에 싸온 도시락에서 유래한 명칭), '런케이션'(Learncation/Learning과 Vacation을 합친 신조어), '플로깅'(Plogging·이삭을 줍는다는 의미의 스웨덴어 Plocka upp과 영어 Jogging의 합성어) 등이 있다.
업무 담당자나 관련 업계 종사자들에겐 익숙할 수 있지만 어린이나 고령층 등 정보 소외계층에게는 정보 접근을 방해하는 장벽이 될 수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특히 일부는 우리말로 순화했을 때 정책의 의미 전달이 명확할 수 있어서다.
◆ 전문가들 "외국어 남용, 알권리 침해"
전문가들은 공공영역에서의 잦은 외래어·외국어 사용은 단순히 영어를 많이 쓴다는 차원을 넘어선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공공영역 전반에서 한글 사용이 심각하게 위축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경북대 이상규 명예교수(국어국문학·전 국립국어원장)는 "정부의 국어정책은 형식에 그치고 있다. 중앙부처나 지자체에 공공언어 개선 업무를 담당하는 국어책임관도 있으나마나하다. 실질적으로 보도자료 등 관용문서에서의 외래어·외국어가 범람하는 것도 이 때문"이라며 "현행 국어체계의 획기적인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제 우리말은 조사와 어미만 남았다고 할 정도로 기반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일상에서 무분별한 외국어 사용이 걸러지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외국어 발음을 한글로 최대한 비슷하게 옮기는 표기방식인 '외국어 음차표기'와 '약어'를 사용하는 것이 하나의 사회적 풍조로 굳어진 것도 문제"라며 "외국어 음차표기, 우리말의 구문을 머릿말만 따서 엮어내는 등 이상한 방식으로 발전이 되고 있는 현상이 계속된다면 혼이 들어 있는 순수 우리말 자체가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크게 우려했다.
국어학계는 국민의 알권리와 정보 접근권 보장을 위해서라도 공공영역에서의 외래어·외국어 사용을 최소화하고 알기 쉬운 우리말로 정책 및 민원 용어를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북대 안미애 교수(국어국문학·한국어문화원장)는 "언어는 유기적이기 때문에 모든 외래어, 외국어를 배제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모두가 정보에 평등하게 접근하고 교육이 평등하게 이뤄지는 게 아닌 만큼 가능하면 모두가 알 수 있는 말을 통해 알권리의 평등권, 정보 접근권을 보장해야 한다"며 "한국어로 대체하기 어려운 용어나 정확한 정보전달이 필요한 경우 원어를 병기하되, 남도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언어사용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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