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호기자의 봄여름가을겨울] 1부 봄 이야기-통영에서의 1박2일
통영의 대표적 수산물을 한눈에 보여주는 중앙활어시장 골목 전경. |
동피랑에서 제일 예쁜 카페 겸 게스트 하우스 ‘소오’를 들렀다.
앳된 여사장 김새아롬씨가 모친을 소개해준다. 모녀의 미소는 설렘 가득. 뭐랄까, 남태평양 리조트에 갓 여장을 푼 뒤 잠시 커피를 마시는 표정이다. 누가 손님이고 주인인지 잘 모르겠다. 미끈거리는 통영 봄햇살 넣은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동피랑 벽화작업에 참여했다가 자기가 그린 ‘나는 파랑새를 보았다’란 벽화집에 눌러앉은 화가가 있어 찾아가 봤다. 대구 반야월 출신의 장명환씨(36). 그림도 그리고 아기자기한 공예품 등도 판다. 장씨도 통영에서 봄햇살을 빨리 감지하는 축에 든다. 광고디자인을 전공한 그는 7년쯤 직장생활을 하다 때려치우고 동피랑에서 그림가게를 운영한다. 그러면서 제2의 바스키야(1980년대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28세에 세상에서 사라진 뉴욕 출신의 화가로 ‘낙서화가’로 유명하다. 지하철 벽이나 건물외벽에서 볼 수 있는 그라피티의 선두주자)를 꿈꾼다. 곧 뉴욕으로 여행을 떠날 모양이다.
김밥도 꿀빵도 원조에 의미 없어
아무데서나 사 먹으면 그게 정답
우동·짜장을 동시에 먹는 ‘우짜’
말린 고구마로 만드는 ‘빼떼기죽’
새벽 서호시장 소주방도 명불허전
◆홍상수의 하하하… 그리고 통영
1995년 충무는 통영에 통폐합된다.
300년간 ‘삼다도수군통제영’의 사령부가 있었다. 통제영에서 나온 통영, 570여개의 유·무인도를 가진 섬나라다. 신안군 다음으로 부속도서가 많다.
통영 관광마케팅에 혁혁한 공로를 세운 영화 하나. 2009년 상영된 홍상수 감독의 ‘하하하’다. 홍 감독의 모친이 통영 출신이란 걸 이번에 알았다. 이 영화는 조금은 어리바리한 두 남자(김상경과 유준상)가 통영에서 찌질하게 헤매고 다닌 얘기를 담고 있다. 영화를 보고 나면 홍 감독의 ‘경주’란 영화 때처럼 갑자기 통영에 가보고 싶게 만든다. 실제 그 영화 보고 찾은 ‘통영맨’이 부쩍 많다. 영화 때문에 특수를 누리는 모텔이 있다. 바로 강구안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창을 가진 나폴리다. 나폴리 때문에 스타일을 조금 구긴 언덕이 있다. 바로 모텔 뒤편의 동피랑이다. 사람들은 나폴리 모텔만 사라지면 동피랑은 그리스 산토리니섬 못지않은 풍광을 갖게 될 것이란다. 아무튼 나그네는 그날 나폴리에서 잤다.
다음날 아침 봄 일출의 햇살은 오전 7시를 조금 넘자 왼쪽 남망산을 넘어 항남동에 상륙했다. 창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바람결이 미지근했다. 강구안이 한눈에 들어오는 남망산을 올랐다. 동백꽃이 지천이다. 한쪽은 지고 한쪽은 피고 있다.
◆꿀빵과 김밥… 원조 없다
12일, 서호전통시장(5일장)이 열리는 날이다.
장에는 가장 일찍 봄이 출시된다. 한 도시의 요리를 알려면 반드시 전통시장부터 장악해야 된다. 모텔을 나와 해안도로변을 15분 정도 걸었다. 여객선터미널 앞은 충무김밥 천국이었다. 누군가 추천해 준 김밥집에 갔다. 1인분 4천원짜리 충무김밥을 2인분 시켜서 시래깃국과 함께 먹었다. 유명해서 그런지 1인분은 안 판단다. 주인도 없고 베트남 출신 직원이 매장을 관리하고 있다. 식당 관련 기사가 적힌 신문을 액자로 만들어 걸어놓았다. ‘이건 아닌데’란 기분이 들었다. 관광지 속 식당. 맛은 따지지 말 것. 한통속 맛이다.
통영에서 김밥과 꿀빵은 원조가 별 의미 없다. 원조(元祖)란 단어가 갑자기 ‘원조(遠祖)’란 말로 들린다. ‘우리 식당은 원조에서 가장 먼 식당’이란 의미랄까.
충무김밥은 뚱보할매 때문에 유명했다고 생각했던지 자꾸 뚱보할매에 의지하려 한다. 김밥은 아무 데서나 사먹으면 된다. 그게 정답이다.
꿀빵도 통영에서는 봄이다. 어두컴컴한 사람의 입안을 달달하게 치장하기 때문이다. 60년대 밀가루가 풍부해지기 시작하던 시절에 꿀빵이 등장한다. 6·25전쟁 직후 통영의 제과점에서 처음 만들기 시작했다가 널리 퍼진 통영식 빵이다. 경주 황남빵 같달까. 밀가루 반죽에 팥앙금을 넣고 튀긴 도넛에 꿀 쬐끔 섞인 물엿을 바른 것이다. 경쟁 탓에 별별 소가 다 등장한다. 고구마, 쑥, 유자 등에 이어 멍게·해삼·청국장까지 들어간다.
통영꿀빵의 원조는 오미사꿀빵. 그 때문에 꿀빵 특수가 일어났다. 창립자인 정원석씨. 그는 한때 통영 평화당 제과점의 제빵사. 아내는 과일 좌판상이었다. 제과점을 나온 정씨는 신혼집 앞 아내 좌판 옆에서 빵을 팔았다. 근처 여학생한테 인기짱이었다. 학생들이 무명의 빵을 위해 이름을 지어주었다. 빵집 옆에 오미사란 양복점이 있었다. 그래서 ‘오미사꿀빵’이라 불렀다. 양복점은 지고 이제는 오미사꿀빵만 남았다. 한때 분식점도 했지만 98년쯤 꿀빵에만 전념한다.
통영에서 발생한 ‘우짜’와 ‘빼떼기죽’도 먹어봐야 한다. 우짜는 우동과 짜장을 동시에 먹도록 한 메뉴. 빼떼기죽은 말린 고구마로 만든 변형 ‘고구마죽’으로 이해하면 된다.
◆서호시장의 소주방
서호재래시장은 새벽 3시부터 풀가동된다.
장터 아낙네들은 찬 몸을 녹이기 위해 소주방에 전화를 걸어 잔소주를 시켜먹는다. 모닥불보다 소주가 더 몸을 빨리 덥힌다고 본다. 식사하러 갈 겨를이 없다. 술만 있으면 장터 나온 한물간 농수산물을 대충 요리해 먹으면 된다. 통영식 소주방 문화는 항남동 뒷골목 술문화와 접촉하면서 통영밖에 없다는 ‘다찌문화’로 발전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통영의 밤, 주당들은 ‘다찌’가 있어 견딜 수 있단다. 한국에서 가장 푸짐한 한상차림 안주, 가장 비싼 추가 소주 비용(1만원·맥주는 6천원)이다. 다찌는 1인당 3만원 정도 생각하고 이용하면 된다. 광복 직후 항남동의 ‘민주당’이란 술집을 통영다찌의 출발로 보는 이도 있다. 나그네는 그날 밤 항남동 ‘강변실비’에서 토박이들만 맛볼 수 있다는 다찌 안주상에 탄성을 연발했다. 얼음 채운 빨간 플라스틱 들통(바케쓰)에 술병을 담아 오는 게 다찌의 폭소 포인트.
강구안 뒷골목은 대구로 말하면 북성로·향촌동 뒷골목 같다. 한때 통영의 최고 번화가였지만 지금은 퇴락해버렸다. 푸른통영21추진협의회가 300여m 이 골목을 스토리텔링 거리로 분칠하기 시작한다. 관광객은 강구안에서 여객선터미널로 이어지는 해안로 꿀빵·김밥거리에만 유독 바글거린다.
한 발만 뒷골목으로 들여놓으면 너무 한적하다. 그래서 더 힐링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잘 들르는 로스팅 하우스가 있다. 서울에서 연극활동을 하다가 고향으로 내려와 강구안 뒷골목에 민들레 홀씨처럼 내려앉은 ‘수다’다. 로스터 윤덕현씨가 직접 드리핑한 6천원짜리 에티오피아 코케허니를 우아한 포즈로 마셨다. 수다의 커피향은 어둑한 골목을 환하게 밝히는 멋진 봄 햇살이다.
나그네는 통영의 봄, 그 마지막 자락을 항남동 골목길 입구에 서 있는 한 상징물에서 봤다.
2013년 강구안 골목 입구에 세워진 조형물 ‘이중섭 물고기’이다. 이 물고기는 통영에서 2년여 작품활동을 한 이중섭 화가의 ‘물고기와 노는 세 아이들’ 중에서 물고기를 형상화한 작품. 프랑스 환경미술팀 ‘아트북 컬렉티브(장 미쉘 후비오, 얄룩 마스, 마갈리 루이스)’가 한 달여의 작업기간을 거쳐 완성했다. 이 작품의 물고기 비늘은 스테인리스 재질인 밥그릇 뚜껑.
물고기를 본 뒤 골목 안 벽에 걸린 ‘윤이상과 달무리’를 감상한다. 이 작품은 통영 출신 세계적 작곡가 윤이상이 작곡한 달무리 악보의 음표를 확대, 자전거로 형상화한 것이다.
◆떠나기가 조금 아쉬운가?
그럼 조금은 촌스러운 금잔디 미용실에서 머리를 다듬고 족히 50년을 넘었을 것 같은 항남동 뒷골목 안 대중목욕탕 ‘시민탕’에서 목욕해보라. 가수 최백호의 노래 ‘낭만에 대하여’에 등장하는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이 있을 것 같은 그 시절 다방에 앉아 지그시 눈도 감아보라. 시간이 좀 더 넉넉하다면 전혁림 미술관 옆 손바닥만 한 동네책방인 ‘봄날의 책방’을 찾아가보라. 책방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아 커피를 마셔보라.
하루 더 묵고 싶다면, 책방 바로 옆에 있는 북스테이용 게스트하우스 ‘봄날의 집’을 노크하시길. 잠자는 내내 통영 바다 버전으로 넘실거리는 자신을 꼭 발견해 보시길.
글·사진= 통영에서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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