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를 읽고
대학·일반부 최우수상 수상자 박경한. |
#1 어릴 적 학교 운동장에서 그네를 자주 탔었다. 그넷줄을 두 손으로 꼭 붙잡고 발판을 구르면 그네는 천상으로 날아올랐다. 동화 속의 주인공인 듯, 하늘을 날아가는 새인 듯 소년은 지상의 사람이 아닌 듯 신이 났었다.
어른이 된 지금, 얼마 전에 공원에 있는 그네를 탔다. 늦은 밤이라서 인적이 없고 별 몇 개만이 허허롭게 물수제비를 뜨고 있었다. 세계와의 갈등, 가족과의 불화를 생각하면서 그네를 탔다. 술을 마신 탓인지 그네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자주 삐걱거렸고 집은 가까웠지만 너무나 멀었다.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라는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생각하면서 그렇게 오래 앉아있었다.
#2 쇼펜하우어는 "세상이란 실은 지옥이다. 인간은 고통받는 영혼이다"라고 주장했다. 다시 말하면 일체개고(一切皆苦)의 불교 경전 내용과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현실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 세계에 버려지고 던져진 존재로서 밥벌이의 비참을 견뎌야 하고, 대상과의 갈등과 간난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 더구나 성인이 되고 결혼한 후의 가정 모습은 화택(火宅)일 경우가 허다하다.
여름의 물푸레잎 같던 청춘의 육신도 어느샌가 병들고, 얼음처럼 성성하고 차가웠던 정신의 근육도 언젠가는 풀리고 느슨해져 간다. 미래에 다가올 죽음에 불안해하고 무방비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자의 운명에 통감할 수밖에 없다. 삶은 닻이 아니라 덫일 때가 훨씬 더 많다. 그리고 인간은 창조주께서 흙으로 빚었기 때문에 깨지기 쉬운 존재임이 분명하다.
어른인 내가, 가장인 내가 늦은 밤에 그네를 탄 것은 멧새가 보리수나무 위에 앉듯이 현실의 곤혹과 비참에서 잠시 벗어나고자 한 방편이었는지도 모른다.
#3 그네의 발판이 실존의 고통이라면 그네의 두 줄은 행복과 불행의 메타포이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행복은 절대적으로 지속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사실이다. 배가 불러도 불편을 느끼고, 배가 고프면 고통을 느끼는 것이 인간이다. 사랑 또한 영원한 사랑은 없다.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거짓말은 당신을 영원히 사랑한다는 말일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익시온처럼 불타는 수레바퀴에 매달려 영원한 고통과 불행 속에서 살아야 하는가. 제우스의 선처를 그저 기다려야만 하는가. 쇼펜하우어는 인간은 행복 없이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조금 덜 행복하면 되는데 우리는 너무 크고 완전한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에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행복이라는 기대의 무게를 줄이면 불행의 무게도 비례해서 줄어든다는 것이다. 즉, 쾌락의 양을 늘리는 것보다 고통의 부피를 줄이는 태도가 현명한 삶의 자세라는 것이다.
여기서 쇼펜하우어의 지혜가 빛난다. 현자들은 범인들과는 달리 인식을 전환하고, 역발상을 하는 전문가이다. 안도현 시인의 시에서처럼 "여름이 뜨거워서 / 매미가 우는 것이 아니라 / 매미가 울어서 / 여름이 뜨거운 것이다"라는 인식의 전환에 이르게 된다. 고통(苦痛)이라는 한자도 고통(苦通)으로 해석한다면 세상의 이치가 '괴로워야 통한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세상을 조금 덜 고통스럽게 사는 방법은 행복에 대한 기대치를 줄이는 것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내가 세계, 가족과 불화를 생각하며 늦은 밤 그네를 탄 것은 행복에 대한 욕구의 과잉에 기인한 것 때문이 아닌가. 쉬지 않는 욕망을 되풀이하면서 결핍의 연속선에 서 있었던 것은 아닌가. 양극단을 극복하지 못하고 아상(我相)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고통의 강물에 빠져 허우적거린 것은 아닌가.
인생의 그네는 두 줄이다. 행복이라는 줄을 너무 꽉 잡으려 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불행이라는 줄을 일부러 잡을 필요는 없다. 고통의 원인을 제대로 알아차리면 행복의 그넷줄은 견고해질 것이다.
#4 사람들이 그네를 타는 이유는 이쪽(지상)보다는 저쪽(천상)을 지향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쪽 세상이 구심력과 구속의 공간이라면 저쪽은 원심력이자 자유의 공간이 될 것이다. 행복(저쪽)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그네의 발판을 힘껏 굴러주어야 한다.
발판을 굴러주는 힘의 강도는 아마도 마음공부의 양에 비례할 것이다. 마음의 소는 채마밭으로 들어가기 쉽고, 지붕이 성글면 비가 새기 마련이다. 마음공부는 혼자 하는 것이고 밖에서 구하지 않고 안에서 구하는 연습이다. 즉 자신의 고독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고독은 위대한 사람의 특성이다. 고독은 인간의 내면을 살피고 타인을 보살피며 인간의 정신을 고양한다. 시간에는 두 종류가 있다. 먼저 크로노스(chronos)의 시간은 수평적인 시간, 단선적, 생로병사의 시간이다. 그리고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은 수직의 시간, 주관적, 질적인 시간이다. 예수도 광야의 수평적 삶에서 골고다 언덕의 수직적 삶으로 변화시켰고, 부처도 석가모니의 일상적 삶에서 설산에서의 수직적 삶으로 변화시켰다. 철저하게 자신과 대면하고 수양하면서 세계의 진리를 깨우친 자는 위대하다. 이분들은 자신이 행복을 성취하고 인류가 행복을 누리는 방법까지 가르쳐 주었다. 자신의 고독을 거름으로 삼아 씨앗을 뿌리고 인류가 행복의 열매를 딸 수 있도록 농사를 지으셨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진리라는 것을 현자들은 이미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 고독 속에서 수오지심(羞惡之心)을 실천하고, 인간 조건에 대한 끝없는 연민인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마음을 돌렸다. 타자에 대한 측은한 마음은 이 세계를 인드라의 그물로 연결할 것이다. 고독은 저쪽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5 '인간은 다른 생명처럼 살려는 의지에 살아가는 수동적인 존재이긴 하지만 이 세계에서 개성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는 능동적인 존재이다. 누군가가 행복한지 보려면 그 사람이 어떤 고통을 잘 견뎠는지를 봐야한다'라고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속의 '속(俗)'자는 '사람마다 계곡이 있다.'는 것으로, 그만큼 인생살이가 힘겹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비행기는 공기의 저항 때문에 날 수 있고, 배는 물의 저항 때문에 뜰 수 있다. 어쩌면 어둠은 빛의 어머니이다. 역설적이지만 진짜 아름다움은 위태로운 것 속에서 태어난다. 아이를 구하기 위하여 불 속으로 뛰어드는 소방관의 모습은 위태롭지만 아름답다. "너희는 피로 써라"라는 니체의 글쓰기는 위태로워서 아름답다. 고통을 잘 견딘 자들의 삶은 간난과 갈등이 없고 자유롭다. 고통과 불행은 인간을 저쪽으로 날아가게 하는 그네 타기의 원동력이다.
1#6 다시 그네를 바라본다. 그네는 삶의 은유다. 그네의 발판은 밥벌이와 인간관계로 늘 고달프고, 폐지를 줍는 노인의 등에는 땀 마를 날이 없다. 그네의 두 줄은 행복과 불행이다.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으로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의 그넷줄을 잡을 수 있다. 그네의 저쪽(천상)이 행복의 공간이라고 할 때, 그 공간에 닿기 위해서는 마음공부가 필요하다. 고독 속에서 자신이 내면을 살피고, 위대한 고통을 잘 견딘 자들의 삶은 그만큼 넓고 깊으며 타자와 연결될 수밖에 없다.
한여름을 견딘 매미의 울음소리가 희미해져 간다. 몸이 까맣게 타들어 가도록 울었으므로 저들은 저쪽(천상)에 갈 수 있으리라고 예감하며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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